주식시장, '한국기업 강해졌다'
전성훈
indijeon@naver.com | 2011-12-26 14:37:23
시장은 크게 흔들리지 않았다.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의 사망 소식이 전해진 이튿날인 20일 금융 시장은 비교적 굳건한 모습을 보였다. 전문가들은 “일단 안정세를 찾은 것”이라고 진단했다. 전날 급락했던 주가와 원화가치는 반등했다. 20일 코스피는 전날보다 16.13포인트(0.91%) 오른 1793.06으로 마감했다. 달러화에 대한 원화 가치도 전날보다 12.60원 상승해 1162.20원을 기록했다.
한국 정부의 신용위험을 국제 사회는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이날 뉴욕 장외시장에서 한국 정부가 발행한 5년 만기 외화채권에 대한 신용부도스와프(CDS) 프리미엄은 168bp(1bp=0.01%포인트)로 마감했다. 전 영업일(16일)에 비해 9bp가 상승했지만, 지난해 천안함(5월 20일)·연평도(11월 23일) 사태 당일엔 각각 22bp·29bp가 올랐던 것과 비교하면 양호한 편이었다. 대우증권 이승우 연구원은 “북한 문제가 시장을 오래 발목 잡은 경우가 없었다는 학습 효과 때문에 시장이 빠르게 회복됐다”고 풀이했다.
국제 사회는 한국 정부보다 대기업·금융회사에 더 강한 신뢰를 보였다. 대부분 기업의 CDS프리미엄은 제자리걸음을 했고, 일부는 오히려 소폭 하락했다. 삼성전자(118bp)·한국전력(181bp)·하나은행(201bp)·국민은행(200bp)·신한은행(210bp) 등은 CDS 프리미엄이 지난 주말 이후 변동이 없었다. 포스코는 210bp에서 207bp로 되레 하락했다. LG경제연구원 신민영 경제연구실장은 “한국의 글로벌 기업들은 수출 주도형이기 때문에 한반도 정세에 큰 영향을 받지 않는다는 것이 국제 사회의 시각”이라며 “이런 기업들이 버티고 있기 때문에 한국 경제 전반에 대한 신뢰도 크게 흔들리지 않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기업이 발행한 외화채권은 거래 자체가 많지 않아 CDS프리미엄만으로 기업의 신용위험을 따지는 건 한계가 있다는 지적도 있다. 김인호 전 경제수석(시장경제연구원 이사장)은 “필요 이상의 과잉반응을 보이며 위기감을 조성할 필요가 없다”며 “단기적으로 영향을 받겠지만 이번 사태가 북한의 개방을 앞당기는 계기가 될 수 있다”고 말했다.
정부는 외환시장 움직임을 주시하고 있다. 박재완 기획재정부 장관은 이날 정부 중앙청사에서 대외경제장관회의를 주재하면서 “정부는 환율 급변동 등 외환시장 동향을 예의주시하고 있으며 필요하면 시장 안정을 위해 적절한 조치를 다할 것”이라고 밝혔다.
일각에선 “시장이 잠시 숨고르기에 들어갔을 뿐 언제 출렁일지 모른다”는 경계의 목소리도 나온다. 삼성경제연구소 권순우 상무는 “한국 경제가 고질적으로 안고 있는 지정학적 리스크에 불확실성의 재료가 하나 더 추가된 셈”이라며 “향후 북한 사회의 권력 구조가 어떻게 재편될 것인지 지속적으로 관찰해야 한다는 점에서 장기적 부담으로 작용할 수 있다”고 조언했다. 정부 관계자는 “프랑스의 신용등급 강등 가능성 등으로 향후 금융시장이 출렁거릴 수 있다”며 “북한 변수 못지않게 유럽 재정위기에도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김정일 보다 무서운 마리오 드라기 유럽중앙은행 총재
김정일보다 마리오 드라기 유럽중앙은행 총재가 더 무섭다?
김정일 사망 소식이 전해지면서 전날 3% 넘게 급락했던 코스피가 하루 만에 반등에 성공했다. 20일 코스피지수는 전날보다 0.9% 상승한 1793.06으로 마감했다.
전날 밤 일부 투자자는 역외 선물환 시장의 움직임에 촉각을 곤두세웠지만, 19일(현지 시각) 뉴욕 외환시장에서 한국 원화 선물은 달러당 1178원에 거래돼, 서울 외환시장 마감 가격(1177.3원)과 별 차이가 없었다.
김정일 사망 충격파가 미풍에 그치자, 20일 서울 외환시장도 곧바로 평정을 되찾았다. 이날 달러화 대비 원화 환율은 12.6원 내려, 19일 상승분(16.2원)을 대부분 반납했다.
전날 밤 뉴욕 증시는 상승세를 이어가다 결국 하락세로 마감했지만, 반전의 계기는 김정일 변수가 아니라 마리오 드라기 유럽중앙은행(ECB) 총재였다. 그는 이날 오후 유럽연합(EU) 의회 연설에서 유로존 재정 위기국의 국채 매입을 더 늘리지 않겠다고 발표했다. 기존 방침을 재확인한 것이었지만, 이 소식이 전해지면서 미국 다우지수는 상승세가 꺾였고, 전날보다 100포인트(0.8%) 하락한 1만1766.3으로 장을 마감했다.
◇하루짜리 김정일 쇼크
"과거 김일성 사망 이후엔 주가가 어떻게 됐나요?" 김정일 사망 소식이 전해진 19일 은행가 PB센터엔 이런 문의 전화가 빗발쳤다. "별 영향이 없었다"는 답을 들은 고객들은 주식 투매 대신 대부분 관망 자세를 보였다.
신동익 한국투자증권 부장은 "1994년 김일성 사망 당시 주식시장은 별 충격을 안 받았다"면서 "학습 효과 때문인지 투매에 나서는 사례는 없었다"고 말했다.
해외에서 김정일 사망 변수를 보는 시각도 비슷하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서 한국 경제를 담당하는 랜달 존스 팀장은 "과거 북한 관련 사례를 볼 때 이번 주 내로 증시가 정상화될 것"이라고 예상했다.
요즘 투자자들이 촉각을 곤두세우는 변수는 북한이 아니라 유럽발 재정 위기다. 대신증권 관계자는 "자산가들은 북한 이슈보다 프랑스 신용등급 강등 여부 등 유럽 문제가 어떻게 진행될지에 더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다"고 말했다.
강북 자산가를 주로 상대하는 동양증권의 A 팀장은 "일부 큰손 중엔 김정일 사망을 저가 매수 기회로 보고 하루짜리 단타 매매로 재미를 본 경우도 있었지만, 큰손 대부분은 당분간 유럽 추이를 지켜보겠다며 관망하는 태도를 보이고 있다"고 말했다.
◇"북한제 시한폭탄 단 셈"이란 의견도
하지만 일부 전문가는 김정일 사망으로 한국 증시가 언제 터질지 모르는 '북한제 시한폭탄'을 달게 된 격이라고 보기도 한다. 한국은행 고위 관계자는 "북한 내부의 권력투쟁이 격화되고 지정학적 위험이 커지면 북한 변수는 유럽 변수를 압도하는 폭발력을 가질 수 있다"며 "그럴 때는 증시보다 외환시장이 더 문제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스위스 투자은행인 UBS도 “과거 북한 관련 사건들은 정치적으로 계획된 거라 충격도 단시간에 끝났지만 이번엔 어느 사건보다 불확실성이 크다”며 “북한 권력 계승이 가시화될 때까지는 한국 금융시장의 출렁임이 계속될 것”으로 분석했다.
이 때문에 한국 시장에 대한 외국인 신규 투자가 위축될 수 있다는 의견도 나온다.
허윤석 우리투자증권 강북센터 부장은 “해외 채권 딜러들이 불확실한 상황이 길어질 수도 있다고 보고 한국 시장에 대한 시각을 수정하고 있다”고 말했다.
◇폭발력은 유럽 변수가 북한 변수 압도
하지만 대다수 전문가는 현재로선 북한 문제보다 유럽 재정 위기가 한국 경제에 훨씬 더 큰 부담 요소로 작용하고 있다고 진단한다. 드라기 총재는 19일 “내년 1분기에 유로존 은행 채권 2300억유로, 국채 3000억유로어치가 만기가 돌아오기 때문에 금융시장에서 엄청난 자금 압박을 받을 것”이라고 경고했다.
9일 한국 증시에서 빠져나간 외국인 투자금(2459억원) 중 유럽계 자금이 2147억원에 이른 점은 유럽 변수의 폭발력을 재확인해주었다.
ECB는 이날 “유로존 재정 위기가 유럽은 물론 세계 금융 안정에 가장 시급한 위험 요인”이라며 “유로존 채권시장의 출렁임이 2008년 리먼 파산 직후 수준에 도달했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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