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英 20세기 최연소 총리' 블레어노믹스, 그 10년의 기록
화려한 정치업적, 그리고 이라크 침공의 과오까지
김형규
fight@sateconomy.co.kr | 2014-04-22 14:24:43
이제 토니 블레어가 영국 총리에서 물러난 때로부터 7년이 흘렀다. 총리 퇴임 시 친기업적 정책 시행의 부작용으로 인한 빈부 격차 심화, 이라크전쟁 참전 결정 등으로 민심을 잃은 그는 한때 80퍼센트에 육박했던 압도적 지지율이 상당히 하락한 상태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014년 현재 전 세계 정치인들 사이에서 여전히 블레어리즘(Blairism)이 유효한 이유는 무엇일까?
《토니 블레어의 여정(A Journey)》은 블레어가 총리 재임기 및 그 전후의 이야기를 직접 기술한 회고록으로, 그간 자신이 내려왔던 수많은 정치적 의사 결정의 과정과 결과를 성찰한다. 블레어의 정치 여정을 따라가다 보면 그가 어떻게 진보와 보수 양쪽 모두의 마음을 사로잡고 가장 유력한 정치인이 되었는지 알 수 있다. 또한 이 책은 ‘테러와의 전쟁’을 적극 지지한 일 등 국제적으로 많은 논란이 일었던 사안들도 정면으로 다뤄 “역사상 가장 솔직한 정치 회고록(옵서버)”이라는 평을 받았다.
하지만 이 책을 단순한 회고록으로만 규정지을 수는 없다. 《토니 블레어의 여정》은 현대 민주주의에서 한 국가의 리더가 겪는 인간적인 고뇌를 고찰한 한 편의 논문이자, 영국에서 만년 야당이었던 노동당을 총선 3연승으로 이끌고 창조경제 모델을 세계 최초로 제시한 정치 지도자가 쓴 정치전략 연구서다. 북아일랜드 평화협정, 코소보 사태, 이라크전쟁 등에 직접 관여했던 정치인의 입을 통해 생생한 사건의 전말을 들을 수 있다는 점에서 중요한 역사서이기도 하다.
토니 블레어만큼 영국의 행보에 근본적인 영향을 미친 총리는 없었으며, 그의 업적과 유산은 앞으로도 지속적으로 논의될 것이다. 그동안 토니 블레어의 면모와 성과를 조명한 저술들이 많았지만, 이 책은 토니 블레어가 자신의 목소리로 삶과 정치 이야기를 들려준다는 점에서 특별하다.
'화려한 정치 업적과 함께 이라크 침공의 과오까지'
고스란히 드러낸 역사상 가장 솔직한 정치 회고록
토니 블레어가 3년간 공들여 쓴 이 회고록은 460만 파운드(약 85억 원)라는 높은 선인세에 판권이 팔렸으며 출간 즉시 아마존 베스트셀러로 등극한 화제작이다. 이 책의 내용은 시기별로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첫 번째는 총리 취임 이전의 정치 성장기이다. 그는 명문 사립학교인 페테스칼리지를 졸업하고 옥스퍼드대학교에서 법학을 전공했다. 옥스퍼드에서 만난 기독교사회주의자이자 호주 성공회 목사인 피터 톰슨에게서 큰 영향을 받아 사회주의와 실용주의에 열정을 갖기 시작했고, 자신의 출신 계층과는 거리가 먼 노동당에 입당했다. 대학 졸업 후 변호사로 일하던 그는 좌익운동가 집안의 셰리 부스와 결혼했고, 골수 노동당원인 장인 토니 부스의 격려를 받아 정계에 입문했다.
블레어는 1983년 영국 북동부의 세지필드에서 하원의원에 당선되면서 정치 여정을 시작한다. 1983년 총선에서 노동당은 대처가 이끄는 보수당에 크게 패했기에 그의 당선은 돋보였다. 하원의원으로 두각을 나타낸 블레어는 1994년 41세로 영국 노동당 역사상 최연소 당수가 되었다. 이후 집권을 목표로 좌파 정당의 근간 이념인 ‘당헌 제4조 국유화 조항’을 포기하고 분배와 성장 모두를 추구하는 ‘신노동당’ 정책을 밀어붙였다.
두 번째는 총리 재임 시절의 국내외 정치 활동에 관한 이야기다. 과감한 개혁 정책으로 중산층의 표심까지 끌어모은 블레어는, 1997년 총선에서 승리해 영국 총리가 됐다. 2001년과 2005년 총선에서도 승리해 노동당 최초의 3연승이라는 진기록을 세웠다. 그는 “경제 발전 없이는 어떤 이데올로기도 무력하다”고 주장하며 실용주의 노선을 택해 국민들의 폭넓은 지지를 얻었다. 유럽의 중도좌파 정치가들이 잇따라 제3의 길을 실제적인 정치 이념으로 채택하면서 ‘블레어리즘’이라는 신조어도 생겨났다. 블레어는 재임기 동안 북아일랜드 분쟁 종식, 지속적인 경제성장(실업률 2.3퍼센트 감소, 1인당 GDP 1만 4751유로 증가), 공공서비스 개혁 등을 일궜다. 특히 국가의료서비스(NHS)와 관련, 보건 예산을 유럽 최고 수준으로 끌어올려 모든 지역 의원에서 이틀 안에 진료를 받을 수 있게 하는 등 NHS의 최대 문제였던 긴 대기 시간을 획기적으로 개선했다. 복지 강화를 통한 ‘균등 분배’보다 교육 개혁을 통한 ‘기회 균등’을 앞세운 것도 블레어 정부의 특징이다.
내정 개혁에 성공한 블레어는 국외 정치에도 눈을 돌렸다. 특히 이라크에 대량 살상 무기가 있다는 추측에 근거, 조지 W. 부시 대통령을 도와 영국군을 이라크전쟁에 대거 파병한 결정은 많은 논란을 일으켰다. 이 일로 그는 ‘부시의 하수인’이라는 조롱과 “토니 블레어의 10년은 이라크 파병으로 빛이 바랬다”라는 비판을 받았다. 그는 지금도 “전쟁 참전에 대해 후회가 없느냐?”는 질문에 시달린다면서 사담 후세인이 유엔의 무기사찰을 집요하게 방해했고, 석유를 팔아 번 돈으로 식량과 의약품을 수입하는 대신 무기를 구매하는 등 서방의 제재를 무력화시켰다고 강조한다. 이라크 상황이 개선될 가능성은 없었으므로 후세인을 제거한 전쟁은 정당했다는 주장이다. 그러면서도 블레어는 이라크에서의 유혈 사태가 장기간 지속될 줄 몰랐으며, 전쟁으로 사망한 군인과 민간인들을 생각하며 좌절했다고 고백한다.
마지막은 총리 퇴임 이후 세계적 리더로서의 행보를 다루고 있다. 퇴임 후 그는 유엔, 유럽연합, 미국, 러시아를 대표해 중동특사로 활동했다. 또한 두 개의 주요 자선재단을 설립했는데, ‘토니 블레어 페이스 재단(Tony Blair Faith Foundation)’은 종교적 극단주의를 방지하고 이에 대처하는 것을, ‘아프리카 거버넌스 이니셔티브(Africa Governance Initiative)’는 아프리카 정부의 개혁을 도와 빈곤을 감소시키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세계 지도자들에 대한 허심탄회한 평가와
정치인 및 사회지도층을 위한 제언이 돋보이는 책
이 책에서 토니 블레어는 다이애나 왕세자비의 죽음부터 테러와의 전쟁까지 최근의 역사적 사건에서 자신이 담당한 역할을 처음으로 밝힌다. 더불어 노동당 인사들과의 관계 그리고 넬슨 만델라, 빌 클린턴, 블라디미르 푸틴, 조지 W. 부시 등 세계 지도자들에 대한 평을 허심탄회하게 털어놓는다. 그는 클린턴 전 대통령이 커뮤니케이션에 대단히 뛰어나며 자신과 정치적으로 잘 통하는 사람이었다고 회상한다. 부시 전 대통령에 대해서는 ‘우연히 대통령이 된 바보’라는 세간의 악질적 평가와는 다르게 대단히 영리한 리더라고 표현하면서, 부시는 뛰어난 직관의 소유자이자 가장 용감한 정치인 중 한 명이라고 평한다. 자신의 뒤를 이어 영국 총리가 된 고든 브라운에 대해서는 신노동당 노선을 따르지 않아 보수당에 패배했으며, 정치적 감각이 부족하고 감성적 지능은 제로라고 강도 높게 비난한다.
또한 이 책은 정치권력의 본질과 행사에 대한 고찰을 담고 있다. 블레어는 정치권력에 얽힌 상세한 이야기를 솔직하고 대담하게, 때로는 풍자적으로 풀어놓는다. 그동안 정치판에서 겪은 우여곡절을 담담히 기술하며 정치인은 물론 보통 사람들에게도 유용한 삶의 통찰을 제시한다. 총리로서 행했던 정치 활동뿐만 아니라 인간적인 면모도 함께 담아내려 했던 집필 의도가 반영된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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