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격담합 '후폭풍'이 몰려온다

정유·LPG·제당·전자업계 줄소송 예고

양혁진

yhj2503@gmail.com | 2012-12-06 16:37:17

업체의 담합에 따른 피해에 대해 최종 소비자뿐 아니라 '중간 소비자'에게도 배상을 해야 한다는 확정판결이 처음 나와 산업계에 큰 파장을 일으키고 있다.


대법원2부(주심 김용덕 대법관)는 지난 3일 제빵업체인 삼립식품이 밀가루 제조업체인 CJ제일제당과 삼양사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소송에서 "CJ제일제당이 12억4000만원, 삼양사가 2억3000만원을 각각 배상하라"고 판결한 원심을 확정했다.


이번 판결로 식품업계를 비롯해 공정거래위원회가 이미 담합을 적발한 제당ㆍ정유ㆍLPGㆍ전자업체 등에서도 중간소비자의 소송이 잇따를 것으로 전망된다.


◇ 담합, 중간소비자에게도 배상해야..
공정거래위원회는 지난 2006년 4월 CJ제일제당과 삼양사 등 국내 8개 밀가루 생산업체가 2001년부터 5년간 조직적으로 생산량과 가격을 담합한 사실을 적발했다. 공정위는 ‘이들 기업이 소비자들에게 4000억원 이상의 손해를 끼친 것으로 추정된다’며 시정명령과 함께 434억원의 과징금을 부과했다.


이에 삼립식품은 해당 업체들에 자발적인 배상 요청 공문을 발송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같은 해 11월 CJ제일제당과 삼양사를 상대로 38억원 규모의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했다.


삼립식품은 “담합으로 부당하게 높은 가격으로 밀가루를 매수하게 돼 막대한 손해를 입었다”고 주장했고 CJ제일제당과 삼양사는 “삼립식품과의 별도 협의를 거쳐 가격을 정했기 때문에 담합이 아니다”라고 맞섰다. 1·2심은 “삼립식품이 밀가루 가격의 부당 인상분 가운데 15억원가량을 떠안게 됐다”며 원고 일부 승소 판결했다.


재판부는 “피고들을 포함한 담합사들이 도매상에 대한 공급 가격을 담합하면서 원고를 포함한 대량 수요처에 대한 밀가루 가격도 인상된 만큼 공정거래법에 따라 원고가 입은 손해를 배상할 의무가 있다고 판단한 원심은 위법함이 없다”고 밝혔다.


◇ 업계, 줄 소송 이어지나
이번 판결이 주목되는 이유는 원료업체의 담합과 관련해 최종소비자가 아닌 중간소비자(식품가공업체 등)들에 대해서도 별도 손해배상을 처음으로 인정받았다는 점이다. 판결의 당사자인 식품업계는 어느 정도 파장이 미칠지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법조계 관계자는 "그동안 공급자의 시장지배력 때문에 식품업체들이 유무형의 피해를 우려해 소송을 꺼려왔다"며 "이번 판결은 중간소비자에 대한 배상책임 법리를 명확히 한 것으로 기업ㆍ소비자의 피해회복 움직임이 활성화될 것"이라고 말했다.


농심ㆍ롯데제과 등 밀가루를 많이 사용하는 라면업체나 제과업체들의 소송이 이어질 가능성도 있다. 또 밀가루 가격인상 타격을 고스란히 받아야만 했던 골목상권의 소규모 제빵업체들이 개별적 또는 단체 소송에 임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정유ㆍLPGㆍ제당ㆍ전자업계도 파장을 우려하는 분위기다. 공정위가 이들 업계의 담합을 적발해 과징금을 부과한 적이 있으므로 중간소비자가 별도 손해배상 소송을 낼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가격담합의 폐해가 많았던 설탕 등 원료업계를 비롯해 최종제품까지 중간단계를 많이 거치게 되는 전자ㆍ자동차ㆍ기계 등 부품산업계 등에도 큰 영향을 줄 것으로 보인다.


가격인상으로 항의를 많이 받아온 LPG업계도 법정소송에 휘말릴 가능성이 크다. LPG를 공급 받는 사설 주유소, 택시회사, 도시가스 소매사 등이 소송에 나설 경우 피해배상문제가 쉽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업계에서는 이번 소송결과가 의미하는 것이 독과점업체들의 담합에 법적 책임을 엄격하게 묻겠다는 경고인 만큼, 관련 업계가 담합으로 기업 이미지가 실추되지 않도록 정도경영에 힘쓰는 계기가 될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이에 따라 산업계 전반에 담합을 원천봉쇄할 수 있는 시발점이 될 수 있다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업계 관계자는 "기업 입장에서는 리니언시(자진신고감면)에 따른 혜택과 집단소송에 따른 손실을 계산할 것"이라며 "앞으로 밀가루 담합과 비슷한 유형이 나오면 중간단계의 기업들이 이를 근거로 손해배상 등에 나설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 리니언시 제도도 손보나
업체의 담합은 그동안 공정위가 주로 과징금으로 처벌해왔으나 시장지배력을 가진 재벌그룹들은 리니언시 제도 등을 활용해 과징금을 면제 또는 감면받으며 담합을 지속해 처벌 효과가 미미했다. 공정위에 따르면 2007년부터 지난해까지 5년 동안 설탕·밀가루·가전제품·보험 업계들은 리니언시 제도를 이용해 1조 2400억원의 과징금을 감면받은 것으로 나타났다.


이번 대법 판결은 담합으로 가장 큰 부당이득을 거둔 시장점유율 1위업체가 자진신고를 통해 과징금을 전액 면제받는 리니언시 제도를 보완한 측면도 있다. 하지만 공정위는 이번 대법 판결로 인해 리니언시를 포함한 기존의 담합 관련 제도를 손봐야 할 필요성이 커졌다. 과징금을 면제받아도 중간소비자에게 따로 배상금을 문다면 현행 리니언시 제도의 효용이 크게 떨어진다는 지적이다.


한편 국회에서도 담합행위를 자진신고한 기업에 대해 과징금을 감면해주는 이른바 ‘얌체 리니언시’를 막는 법안이 발의된 상태다. 정희수 새누리당 의원이 지난달 발의한 공정거래법 개정안은 담합 사례를 자진 신고하거나 공정거래위원회 조사에 협조한 회사가 업계 1위인 ‘시장지배적 사업자’인 경우 리니언시 대상에서 제외하도록 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또 과징금 상한선도 회사 매출액 대비 10%에서 20%로 높이도록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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