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계 ‘큰손’들, 한국 부동산 시장 ‘탈출’
HPㆍSC은행 등… ‘빌딩 매각’ 앞다퉈
유상석
listen_well@sateconomy.co.kr | 2012-09-13 15:46:14
국내 빌딩 시장에서 ‘큰손’으로 통했던 외국인들이 최근 우리나라를 빠져나가고 있다. 한때 막대한 자금력으로 대형 오피스빌딩을 사들였지만 최근엔 투자물건을 처분하는 모습이 역력하다.
오피스빌딩 정보업체인 SIPM에 따르면 올 상반기 외국계 투자자본의 국내 오피스빌딩 매입 실적은 단 한 건도 없다. 지난해만 해도 외국 자본은 적어도 분기당 한 곳 이상씩 빌딩을 사들이며 투자자 노릇을 톡톡히 한 것과는 상반된 분위기다.
외국인들의 소극적인 움직임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매수에 나서지 않을 뿐 아니라 기존에 보유했던 빌딩 매물까지 하나둘씩 정리하고 있는 것이다.
올 1분기 독일계 투자회사인 데카는 명동센트럴타워를 국내 부동산투자회사에 팔아 1100억원을 현금화했다. 외국계 투자사인 맥스씨아이도 여의도 아시아원빌딩을 현대카드ㆍ캐피탈에 매각했다. 2분기 들어서도 한국스탠다드차타드은행(이하 SC은행)이 서울 신천동 전산센터를 국내 부동산펀드에 팔았다.
◇ ‘지금은 탈출할 때’… 매각 잇달아
외국인들의 빌딩 처분 움직임은 당분간 지속될 전망이다. 한국HP는 여의도 HP빌딩 매각을 위해 신영증권 컨소시엄을 우선협상대상자로 선정했다. 독일계 은행인 코메르츠방크도 보유 중인 서울 충무로3가 충무로타워 매각을 추진하고 있다. 싱가포르 부동산투자회사 아센다스가 지분 30%를 보유한 부동산펀드도 씨티은행센터 처분에 나섰다.
몇몇 외국계 자본은 ‘땡처리’까지 마다하지 않으면서 빌딩 ‘급매’에 나서고 있다. SC은행 전산센터 매각가격은 1600억원. 지난해 협상 당시 매각 예정가가 2000억원 이상이었던 것을 고려하면 1년 새 가격이 대폭 떨어진 상황이다. 빌딩업계에서는 분기마다 최소 2~3건씩 외국인들의 빌딩 매각이 이뤄질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글로벌 투자은행(IB)을 중심으로 한 외국계 자본은 그동안 국내 빌딩 매입에 주력해왔다. 론스타, 메릴린치, 맥쿼리, 모건스탠리, 싱가포르투자청(GIC) 등 굵직굵직한 투자자본들은 지난 1997년 말 터진 IMF 외환위기 사태를 계기로 국내 오피스빌딩 시장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다.
유동성 확보에 비상이 걸린 국내 기업들이 대거 매물을 쏟아냈고, 외국계 펀드들이 이 매물들을 헐값에 사들였다. 국내 기업은 구조조정 여파로 자금 사정이 악화됐지만 외국계 펀드는 빌딩 매입에 필요한 자금을 손쉽게 마련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외국계 투자기관들은 빌딩 매입자금의 30% 정도만 본국에서 조달하고 신용도를 바탕으로 국내에서 저리로 차입하는 방식을 활용해 빌딩을 사들였다. 외국계 자본들은 테헤란로 등 중심업무지역에 있으면서 안정적인 임차인 확보, 임대료 수입이 가능한 빌딩을 목표물로 노렸다.
당시 외국계 투자사가 매입한 부동산 중 가장 큰 거래는 테헤란로의 스타타워(현 강남파이낸스센터)였다. 이 빌딩은 외국계 펀드가 강남 빌딩 매매를 통해 가장 큰 매각차익을 남긴 사례로 알려져 있다.
지난 2001년 6월 유동성 위기에 시달리던 현대산업개발이 론스타에 6632억원이라는 ‘헐값’에 팔았는데, 이 빌딩은 다시 2004년 10월 싱가포르투자청에 9500억원에 다시 팔렸다. 매각차익만 2800억원을 넘어섰다.
그러다가 2000년대 중반을 넘어서면서 분위기가 달라졌다. 미국계 자본을 탈피해 호주 맥쿼리, 독일 도이치뱅크, 데카 등 해외 은행 계열 펀드나 기금 펀드 등으로 투자자들이 다양해진 것이다.
2004년 독일계 투자회사인 데카는 여의도 유진투자증권빌딩을 947억5000만원에 사들였고, 영국계 푸르덴셜그룹은 종로 노스게이트타워를 1120억원에 매입했다. 독일 도이치뱅크도 중구 HSBC빌딩, 삼성생명의 충무로 빌딩, 삼성동 빌딩, 여의도 빌딩을 잇달아 매입했다.
하지만 외국 자본 움직임은 예전 같지 않았다. 1990년대 말~2000년대 초반과 달리 외국 기업들 움직임은 주춤해진 것이다. 이런 가운데 해외 자본이 매입한 오피스 펀드 만기가 도래하면서 외국인들이 보유 매물을 하나둘씩 매각하는 움직임도 나타났다.
교보리얼코에 따르면 해외 자본이 보유한 빌딩 매각건수는 2005년 8건, 2007년 12건으로 증가세를 보였다. 물론 2000년대 말까지만 해도 해외 자본이 국내 빌딩 시장을 아예 떠난 건 아니었다. 2004년에는 해외 자본이 국내 빌딩 16곳을 매입했고, 2006년에도 7건, 2007년 8건이나 사들였다.
매입ㆍ매각이 어느 정도 균형을 맞춘 셈이다. 그런데 최근 들어서는 해외 자본의 국내 빌딩 매입이 잠잠해진 반면 매각하려는 수요는 넘쳐나는 분위기다.
◇ 공급과잉으로 공실 늘어 수익 하락
외국인들이 국내 빌딩 매각에 나선 이유로는 첫째, 글로벌 경기 악화로 투자 여력이 줄어든 것을 들 수 있다. 2008년 이후 미국, 유럽 경제 침체가 지속되고 글로벌 금융위기 불안감이 더해지면서 해외 자본들의 투자 여력이 많이 약해진 것이다.
양인희 C&W 이사는 “세계 경기 침체로 다른 나라 투자물건에서 손실을 많이 봤는데 국내 오피스빌딩 매각으로 이를 메우려는 움직임이다. 지금이 빠져나가기에 적당한 시기로 판단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서정렬 영산대 부동산금융학과 교수 역시 “유럽발 재정위기, 내수 부진 탓에 외국 자본들이 투자물건을 보다 엄격히 선별하고 있다. 우리나라 부동산 시장이 이전과 같은 대세 상승기가 아니라는 판단도 영향을 줬다”고 설명했다.
둘째, 국내 오피스빌딩 투자로 기대한 만큼 수익률이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국토해양부에 따르면 글로벌 금융위기가 나타났던 2008년만 해도 국내 오피스빌딩 투자수익률은 연간 13.74%에 달했다. 하지만 최근 들어 연 6% 수익을 내기도 버거운 상황이다. 교보리얼코에 따르면 서울 강남구 일대의 오피스빌딩 임대수익률은 평균 4%에도 못 미친다.
수익률이 떨어진 이유는 국내 경기가 침체되면서 기업들이 임대료가 싼 외곽으로 사무실을 옮기고 있는 데다 을지로 센터원, 여의도 IFC 등 대형 오피스빌딩이 줄줄이 들어서면서 공실률이 늘었기 때문이다.
올 2분기 국내 오피스빌딩 공실률은 전 분기보다 0.6%포인트 오른 8.4%로 2010년 4분기(8.6%) 이후 최고치다. 앞으로도 용산국제업무지구 초고층빌딩, 잠실 제2롯데월드 등 대규모 오피스빌딩 공급이 줄줄이 예정돼 있어, 오피스 빌딩의 수익률 전망은 더욱 어두운 모양새다.
이런 가운데 외국인들은 국내 빌딩 매각 자금으로 인도네시아ㆍ태국 등 동남아 국가 투자를 저울질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이들 국가 빌딩 가치가 상대적으로 저평가돼 있다는 판단에서다.
외국계 자본의 국내 빌딩 매각 움직임은 당분간 가속화할 전망이다. 공실이 많고 임대수익률이 떨어지는데도 매각이 여의치 않은 일부 빌딩은 리모델링을 통해 비즈니스호텔로 바뀌고 있다.
물론 외국인들의 빌딩 매각 움직임이 일시적인 현상에 그칠 것이란 전망도 있다. 실제로 장기적으로 안정적인 수익을 기대하는 싱가포르투자청의 경우 2000년 서울파이낸스센터(SFC), 2004년 강남파이낸스센터(GFC)를 매입해 지금까지 보유하고 있다.
외국인들의 탈출 러시는 국내 투자자들에게 기회가 될 수 있다. 서울 핵심 지역에 위치한 알짜 매물을 보다 저렴하게 구입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투자 환경이 녹록지 않다는 게 문제다.
[ⓒ 토요경제. 무단전재-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