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해용 칼럼] “공을 이룬 자리에 오래 머물지 말아야”
정해용
peacepress@hanmail.net | 2016-03-14 09:05:47
토요경제 상임논설위원
國有道則仕 國無道則隱 국유도즉사 국무도즉은
정치가 올바를 때 벼슬에 나아가고, 도리에 어긋날 때는 물러난다 <범수채택열전>
세객 채택이 절정의 권력에 이른 범수에게 물러날 때를 놓치지 말라며
허름한 옷을 입고 찾아온 범수를 보고 수고는 문득 불쌍한 생각이 들어 술과 밥을 대접하였다. 수년 전 자신의 질투심으로 인해 모진 고문을 받고 죽어나간 범수를 어찌 잊을 수 있었겠는가. 그런 범수가 다행히도 죽지 않고 살아있는데다 여전히 아무런 권력을 얻지 못한 채 방황하는 모습이었기 때문에 한편으로는 안도감도 생기지 않았을까.
“범숙이 이토록 고생을 하고 있었단 말인가.”라고 묻자 범수는 “죄짓고 도망쳐 나온 사람이 어디서 감히 유세를 하겠습니까.”라고 대답했다. 수고는 미안한 마음이 일어 두터운 솜옷 한 벌을 꺼내 주고는 술잔을 채워주었다. 그러다가 혹시나 해서 물었다.
“그대가 진나라에 오래 있었다면 혹시 장록 선생을 아는가? 위나라의 운명이 진나라 재상인 장록 선생의 손에 달려있다네. 혹시 아는 사람 중에 장 선생과 친한 사람이라도 있는가?”
범수가 태연히 술잔을 비우며 말했다. “저의 주인이 마침 그를 잘 알고 있답니다. 덕분에 저도 재상을 멀리 뵌 적이 있지요. 주인에게 한번 부탁해보겠습니다.”
솜옷 한 벌의 동정으로 목숨을 건지다
범수가 돌아갔다가 약속대로 네 마리 말이 끄는 큰 수레를 손수 몰고 왔다. 수고를 태운 수레는 진나라 재상의 저택으로 들어갔다. 저택 안에 있던 사람들 중 범수의 얼굴을 아는 사람들이 모두 피해 숨어버리므로 수고는 이상히 생각했다. 범수는 수고를 재상 집무실로 안내하며 잠시 기다리라 한 뒤에 안으로 사라졌다. 기다리는 시간이 길어지자 수고는 심상찮은 예감에 문 앞에 있던 문지기를 붙들고 물었다. “범숙이 안으로 들어간 뒤에 나오질 않는데 무슨 까닭이오?” 그러자 문지기는 “여기 범숙이란 사람은 없습니다”라고 답했다. 수고가 답답해 하며 “방금 나와 함께 수레를 타고 온 사람 말이오”라고 말하자 문지기가 “그 분은 우리 재상이신 장록 선생이오”라며 오히려 이상하다는 듯 마주보는 것이었다.
그제야 수고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함부로 벌주고 대자리에 말아 오줌까지 갈기며 모독했던 범수가 진나라의 재상이 되었다니. 놀라움은 둘째 치고, 이제 자신의 목숨은 물론 위나라의 운명까지도 위태롭게 되었다.
수고는 그 자리에서 옷을 벗어 웃통을 드러내고는 문지기 앞에 무릎을 꿇었다.
잠시 후 범수는 화려하고 으리으리한 장막 속에 앉아 많은 시종을 거느리고 수고를 접견했다. 수고는 몇 번이나 머리를 땅에 찧고 부들부들 떨며 범수에게 나아갔다.
“수고는 이렇게 사람 보는 눈이 없으니, 다시는 천하의 책을 읽는다 못하겠고, 다시는 천하의 일을 논하지 못하겠습니다. 제게는 삶겨 죽어도 마땅한 죄가 있습니다. 저의 생사를 공의 손에 맡기옵니다.”
범수가 말했다. “너의 죄는 세 가지다. 내가 제나라와 내통하여 위나라를 팔아넘기려 한다고 위제에게 모함한 죄, 위제가 나를 능욕하고 변소 앞에 버릴 때 저지하지 않은 죄, 위제의 빈객들이 술에 취해 번갈아가며 나의 몸에 방뇨할 때 모른 척한 죄.”
구구절절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그러나 내가 너를 시험하기 위해 찾아갔을 때 두터운 솜옷을 꺼내주며 옛정을 잊지 않은 태도를 보여주었다. 그래서 너를 죽이지 않고 석방한다.”
수고가 돌아가기 전날 범수는 연회를 베풀었다. 각국의 사신들이 초대되어 성대한 술과 음식을 즐기는 자리에서 범수는 숙고를 대청 아래 바닥에 따로 앉혀놓고 마소의 여물을 구유에 담아 내놓으며 억지로 먹게 하였다. “위나라 왕에게 전해라. 즉시 위제의 머리를 가져오라고. 그렇지 않으면 대량성을 허물고 대량 사람들을 몰살시키겠다.” 사신에게 주는 진나라의 공식 통보였다. 이에 위제가 조나라로 달아났다가 다시 우경과 함께 탈주한 뒤 연나라 신릉군의 보호를 받지 못하여 자살한 일은 앞서 소개한 바와 같다.
때를 놓치지 않고 물러나다
응후 범수는 국왕의 절대 신임을 받으면서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권력을 한껏 누렸다. 중원의 한, 위, 조나라를 마음대로 주무를 수 있는 군사력도 있었기 때문에 천하가 그의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아무리 뛰어난 영웅이라도 기우는 해를 붙잡아둘 수는 없으며, 뛰는 재주가 있다면 그 위에 나는 재주를 가진 자도 있는 법이다.
연나라로부터 한 젊은 세객이 진나라로 찾아들었다. 채택(蔡澤)이란 이름을 가진 이 젊은이는 어떻게든 응후를 만나보기 위하여 응후를 깎아내리는 소문을 퍼뜨렸다. “연나라 유객 채택은 천하의 뛰어난 변론가다. 진나라 왕을 만나기만 하면 진나라 왕이 그를 좋아하여 반드시 응후를 곤란하게 할 것이고 필경 그의 직위를 대신하게 될 것이다.”
응후가 소문을 듣고는 채택을 찾아 데려오게 하였다. 채택은 오만한 태도로 들어와서 응후와 변론을 시작하였다. 군주의 도리와 인간의 도리, 신하의 도리와 군자의 도리를 논하고 성인들의 가르침과 영웅들의 생애, 역사의 교훈에 대한 토론이 장시간 이어졌다. 응후는 점점 채택의 해박함에 매료되었고, 채택은 응후의 깊이에 젖어들었다.
“역경(易經)에 끝까지 올라간 용은 뉘우칠 날이 있게 된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오르기만 하고 내려갈 줄 모르고, 뻗을 줄만 알고 굽힐 줄을 모르며, 나아갈 줄은 알고 돌아설 줄 모르는 사람을 비유해서 말한 것입니다.”
채택의 말에 응후가 화답했다. “다행히 선생이 내게 가르쳐주셨으니 삼가 따르겠소.”
범수는 곧 왕에게 나아가 채택을 천거하면서 재상 인을 반납했다. 소왕이 계속 붙잡아두려 했으나 범수는 나이와 병을 구실로 물러났다. 채택이 재상이 되어 명목만 남아있던 주(周)나라를 병합하고 소왕 효문왕 장양왕에 이어 진시황까지 섬겼다. 천하통일을 이루기까지 진나라 정치가 그의 손에서 이루어졌다.
“수고는 이렇게 사람 보는 눈이 없으니, 다시는 천하의 책을 읽는다 못하겠고, 천하의 일을 논하지 못하겠습니다. 삶겨 죽어도 마땅한 죄를 지었으니, 저의 생사를 공의 손에 맡기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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