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경제 17주년 특별기획] 서울 토박이가 말하는 진짜 '서울 이야기'(27)

장화 없이는 못 살았던 ‘진고개(泥峴)’, 물 없는 개천이 있었던 ‘인현(仁峴)마루’, 작은 산처럼 높았던 ‘무악재’, 모든 근심을 잊게하는 ‘망우리고개’

김병윤 기자

bykim7161@hanmail.net | 2022-04-05 23:50:37

서울은 1392년 조선이 건국된 이래 600년 넘게 수도의 자리를 지키고 있다. 서울은 그렇게 우리나라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중심지였다. 서울을 이해한다는 건 결국 우리의 과거, 현재, 미래에 다가선다는 뜻일 게다. 이 연재는 '찐 서울 토박이'자 '대한민국 연예1호' 기자로 불리는 정홍택 선배의 구술을 기초 삼아 김병윤 대기자가 꼼꼼히 현장을 누비며 쓴 글이다. 김 병윤 대기자가 전하는 생동감 넘치는 서울 이야기를 '토요경제 17주년 특별기획'으로 본지에서 매주 2회 독자에게 전하려 한다. [편집자 주]

 

장화 없이는 못 살았던 ‘진고개(泥峴)’
아주 긴 고개다. 숭례문에서 시작된다. 충무로를 거친다. 퇴계로 6가에서 끝난다. 이런 말이 있다. “남으로는 진고개 길이요. 북으로는 피맛길이요”. 피맛길은 사직동에서 동대문까지 이어졌다.

진고개 명칭이 뜻을 나타내준다. 한자로 니현(泥縣)이라 한다. 니 자가 진흙 니다. 땅이 너무 질어서 진고개다. 마누라 없이는 살아도 장화 없이는 못 산다는 뜻이다. 충무로 지역은 진흙이 많았다. 비가 오면 진흙탕이 됐다. 걷지를 못했다. 발이 푹푹 빠졌다. 발걸음을 떼기 어려웠다. 1960년대 까지도 그랬다. 도로포장이 전혀 안 돼 있었다.

양반은 진고개 길로 안 다녔다. 양반이 다니기에는 불편한 길이었다. 진고개는 상권이 발달했다. 옷감, 잡화, 과자(센베이) 화과(和菓)자 등을 팔았다. 생활필수품 위주였다. 일본식품을 내놓았다. 전당포도 많았다. 전당포는 70년대 까지도 성행했다.

서울은 남촌과 북촌으로 나뉘어졌다. 청계천을 경계로 했다. 명동 충무로, 을지로, 퇴계로 등이 남촌이었다. 광화문 이북이 북촌이었다. 남촌 일부에는 일본인이 많이 살았다. 북촌은 한국인의 터전이었다. 남주북병(南酒北餠)이라는 말이 있다. “남쪽은 술이 좋고. 북쪽은 떡이 좋다”라는 뜻이다. 남쪽은 유흥이 발달했다. 회현동에 일본공사관이 생겼다. 음식점, 여관, 유곽(기생집)이 덩달아 문을 열었다. 먹고 놀기 좋아졌다. 소문난 기생집도 모여 있었다. 북쪽에는 떡집이 많았다. 낙원떡집이 유명해진이유다. 양반의 품위를 지키려 노력했다.

남산골샌님이라는 말이 있다. 진고개에서 어원이 나왔다. 과거를 보러 지방에서 올라온 양반 얘기다. 진고개를 거쳐 시험장에 갔다. 과거시험을 보려 여인숙에서 묵었다. 돈이 떨어져 주인에게 사정했다. 과거에 붙으면 주겠다고 했다. 주인장이 떨어지면 어쩔 건가 물었다. 양반은 내 몸을 바쳐 일하겠다고 읍소했다. 과거에 떨어졌다. 양반이 할 줄 아는 게 없었다. 몸으로 때워야 했다. 불우한 양반이다. 샌님의 뜻이다.

남산골샌님은 북촌에 못 올라갔다. 행색이 초라해 양반체면을 구길까봐 그랬다. 양반이 도대체 무엇이길래. 체면이 밥 먹여주나. 신분사회의 단면을 보여줬다. 충무로 끝에 찬 우물이 있었다. 그 물을 마시면 장수한다는 소문이 있었다. 수맥이 있었던 것 같다. 남산의 물로 추측된다. 지금의 세종호텔 부근이다.

진고개에 재미있는 일화가 있다. 실제로 있었던 일이다. 중국 사람 얘기다. 명동이 원래는 중국 사람 본거지였다. 일본인에게 밀려 나갔다. 북창동, 남창동, 소공동으로 옮겨 갔다. 차이나타운이 형성됐다. 유명 중국음식점도 생겼다. 취영루가 유명했다. 물만두를 먹기 위해 줄을 섰다. 차이나타운에서는 도박이 성행했다. 중국인은 도박을 좋아했다. 저녁이면 삼삼오오 모여 들었다. 마작이었다. 중국인의 전통 도박이었다.

중국인의 전통명절이 있다. 춘절이다. 한국의 설날이다. 아주 오랫동안 쉰다. 보통 한 달은 논다. 이 기간 동안 일이 벌어졌다. 마작을 즐겼다. 판이 커졌다. 식당을 담보로 내걸었다. 춘절이 끝나면 주인이 바뀌었다. 어제의 주인이 종업원이 돼 있었다. 다음 춘절이 끝나면 또 주인이 변했다. 옛 주인이 가게를 되찾았다. 희한한 풍속도였다.

물 없는 개천이 있었던 ‘인현(仁峴)마루’
물이 없는 개천이 있었다. 마른내라 했다. 비가 오면 사정이 달라졌다. 갑자기 물이 불어나 거센 물결이 휘몰아쳤다. 지금의 명보극장 건너편이다. 한국의 할리우드 충무로와 가깝다. 배우, 가수, 작곡가, 작사가가 인현동에 많이 살았다. 연예계 인사의 출근 장소였다. 다방이 많았다. 연예인의 사랑방이었다. 직업에 따라 모이는 다방이 달랐다. 크게 가요와 영화로 구분됐다.

카나리아 다방이 있었다. 가요 쪽 인사가 주를 이뤘다. 작곡가 박시춘, 작사가 반야월을 중심으로 모였다. 가수 신 카나리아가 주인이었다. 황금심과 아주 친했다. 언니 언니하며 붙어 다녔다. 친자매 이상이었다. 황금심은 원로가수 고복수의 부인이다. 신카나리아는 공짜 커피를 많이 줬다. 연예인들이 돈이 없었다. 마시는 사람도 부담이 없었다. 가족 같은 분위기였다.

스타다방이 있었다. 영화 관계자의 집합소였다. 신영균, 최무룡, 김지미 등이 중심이었다. 충무로 스타들이 많이 모여 있었다. 이름 그대로 별들의 잔치였다. 연예인의 식사는 단출했다. 스타의식이 없었다. 설렁탕으로 한끼를 때웠다. 막걸리 한 사발과 함께. 오래된 설렁탕집이 있었다. 파주옥이다. 지금도 영업을 한다. 당시의 음식점도 많이 남아있다.


작은 산처럼 높았던 ‘무악재’ 

▲ 무악재고개 <사진=김병윤 대기자>

 

눈물의 현장이다. 독립운동 열사의 혼이 서려있다. 매우 높은 고개다. 인왕산 뒤쪽과 안산 앞쪽을 연결시켜 준다. 말이 고개지 작은 산이다. 서대문 형무소가 있었다. 형무소가 들어선 이유가 있을 게다. 무악재가 워낙 외지고 험했다. 사람의 접근이 어려워 수형자를 관리하기 편했다. 눈을 피하기 좋았다. 일제는 천혜의 조건을 악랄하게 이용했다. 모진 고문이 이뤄졌다. 많은 독립 운동가가 삶을 마감했다.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독립운동의 흔적들이 그대로 보존되고 있다.

무악재는 고개가 아주 험했다. 호랑이가 자주 출몰했다. 조선 말기에서 일제 강점기까지 나타났다. 인왕산 호랑이라는 말이 있다. 실제로 있었던 일이다. 동네에서 가축을 못 키웠다. 호랑이가 올까 봐. 손전등이 많이 팔렸다. 호랑이 접근을 막기 위해서다. 호랑이는 불빛을 꺼린다.

무악재는 교통의 요지였다. 지금의 고양으로 가려면 꼭 통과해야 했다. 무악재를 거쳐야만 했다. 정부가 대책을 세웠다. 양민보호에 나섰다. 병졸들을 배치해 총으로 무장을 시켰다. 지금의 경찰 노릇을 했다. 양민의 개별통행을 금지시켰다. 적정인원을 한데 모았다. 병졸의 보호아래 고개를 넘었다. 무악재에는 호랑이만 있던 게 아니다. 산적도 있었다. 산적의 폐해가 심했다. 입고 있던 옷을 벗겼다. 신발까지 빼앗았다.

병졸이 위험을 막아줬다. 넘어가는 고개 길이 편안했다. 꼭 편한 것만은 아니었다. 관료들의 비리가 발생했다. 보호비 명목으로 돈을 요구했다. 예나 지금이나 똑같다. 부패관료는 늘 있기 마련이다. 고개가 높아 생겼던 일이다.

무악재를 넘으면 동네가 나온다. 모래네, 불광동이다. 술집이 많았다. 이유가 있다.보부상이 많이 다녔다. 오고가다 술집에 들렸다. 외상이 많았다. 외상 장부도 없었다. 부지깽이로 벽에 외상값을 그었다. 요즘도 술집에서 “긋는다”는 말을 많이 쓴다. 긋는다의 어원이 탄생했다.

무악재와 연결된 고개도 있다. 독 바위 골이다. 독박 골이라고도 한다. 불광동으로 갈때 오른쪽에 있다. 역사적 의미를 품고 있다. 인조반정 때다. 광해군을 몰아낼 때였다. 반정들이 큰 바위 밑에 숨어 있었다. 거사를 성공시켰다. 독박 골이 생겨났다.

박석고개도 있다. 불광동에서 서오릉으로 이어지는 고개다. 박석으로 깔아 놓았었다. 박석은 화강암을 뜻한다. 속설이 있다. 중국사신이 고개를 넘을 때다. 사신의 말이 가지를 못 했다. 말발굽이 떨어지지 않았다. 사신이 내려 절을 하니 발굽이 떨어졌다. 박석고개는 지세가 좋다. 절이 많이 생겼다.

모든 근심을 잊게하는 ‘망우리고개’

▲ 망우리의 공동묘지에는 시대의 선구자들이 잠들어 있다. <사진=김병윤 대기자>

 

원래는 경기도 구리에 속했다. 지금은 서울이다. 태조 이성계와 관련이 깊다. 이성계는 왕자의 난으로 골치가 아팠다. 아들들의 권력투쟁에 환멸을 느꼈다. 자식의 비정함에 몸서리 쳤다. 권력무상에 한 숨을 내뱉었다. 인생의 공허함을 곱씹었다. 세상이 귀찮았다. 빨리 생을 접고 싶었다. 자신이 뭍일 자리를 보러 다녔다. 풍수지리사와 함께 거닐었다. 상왕의 몸으로 그럴 수 있었을까.

이성계는 그리했다. 얼마나 이승생활이 괴로우면 그랬을까. 이해는 간다. 부모가 정말 보고 싶지 않은 게 있다. 자식 간의싸움이다. 천륜을 져버린 아들의 모습에 가슴이 찢어졌다. 지나온 삶의 흔적이 모두 무너졌다. 이성계는 망우리 고개에 올라섰다. 응어리진 마음을 안고 홀로 섰다. 4대산이 다 보였다. 막힌 가슴이 뻥 뚫렸다. 근심걱정이 다 사라졌다. 그 자리에 잠들고 싶었다. 모든 시름을 다 잊으려 했다. 동네 이름이 지어졌다. 망우리라고. 근심걱정을잊는다는 뜻이다. 이성계는 자신의 뜻대로 동구릉 안에 영면했다. 억새가 뒤덮인 건원릉이다.

망우리는 희망의 고개였다. 유생은 장원급제 꿈을 갖고 통과했다. 금의환향 꿈을 꾸며 고개를 넘었다. 한양에 입성하는 길목이었다. 강원도, 충청도, 경상도 유생들이 올라왔다. 과천으로 올 수도 있었다. 유생들이 꺼렸다. 양반이 많아 부딪치기 싫었다. 동북쪽 망우리 고개를 주로 이용했다.

사람의 왕래가 많아졌다. 주막이 생겼다. 여인숙 형태의 상권이 형성됐다. 말을 타고 오는 사람도 있었다. 말에게 먹이도 줘야 했다. 말죽거리가 생겼다. 말죽거리는 여러 군데가 있다. 망우리는 공동묘지로 유명하다. 서울에 남아있는 가장 큰 규모다. 예전에 미아리 공동묘지가 있었다. 사라진지 오래다. 이성계의 선견지명이었을까. 고인이 편히 잠들 수 있는 자리를 제공하고 있다.

 

토요경제 / 김병윤 대기자 bykim7161@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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