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덕형 칼럼] “중대재해처벌법, 평등의 이름 아래 불평등한 현장”
평등의 이름으로 기업을 옥죄는 법, 이제는 현실을 반영해야 한다
이덕형 기자
ceo119@naver.com | 2025-10-16 22:54:20
[토요경제 = 이덕형 기자] 한국의 중대재해처벌법은 사업장의 규모와 관계없이 ‘사망자 1명’이 발생하면 동일한 법을 적용한다. 100명의 근로자가 있는 중소 건설사든, 5천명·1만명이 일하는 대형 현장이든 결과만 같다면 처벌도 같다.
표면적으로는 “모든 생명은 똑같이 소중하다”는 평등의 원칙처럼 보이지만, 현실은 결코 평등하지 않다. 법의 무게는 같아도, 이를 감당해야 하는 기업의 체력과 여건은 천차만별이기 때문이다.
건설현장은 언제나 사고의 위험을 안고 있다. 아무리 철저히 대비해도 예기치 못한 사고는 존재한다. 예고된 위험은 예방할 수 있지만, 돌발적인 사고는 막을 기회조차 없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한국의 법체계는 이러한 현실을 인정하지 않는다.
사망이 발생하면, 그 원인이 인재(人災)든 천재(天災)든 상관없이 ‘경영책임자의 안전관리 실패’로 귀결된다. 예방이 부족했는가가 아니라, 단지 사고가 났는가가 기준이 된다. 그 결과, 100명 규모의 회사 대표와 1만명을 고용한 대기업 CEO가 같은 법정에 선다.
이것이 과연 진정한 평등인가. 외국의 제도를 보면, 한국의 법이 얼마나 현실과 동떨어져 있는지 금세 드러난다. 영국의 ‘Corporate Manslaughter Act’나 호주의 ‘Industrial Manslaughter Law’는 사고의 결과보다 ‘예방 노력’과 ‘관리 체계’를 중심으로 책임을 묻는다.
사망자가 1명이든 3명이든, 기업이 사전에 합리적 수준의 안전 시스템을 구축하고, 위험을 예측·관리했다면 면책될 수 있다. 벌금과 처벌은 일률적이지 않고, 기업의 규모·매출·관리체계 수준에 따라 달라진다. 즉, 법은 같아도 적용의 기준은 현실적이다.
반면 한국은 결과 중심의 법 집행이 고착돼 있다. ‘사망자 1명’이라는 숫자가 법의 출발점이자 종착점이다. 현장의 복잡성, 인력 규모, 관리 시스템의 수준 등은 고려되지 않는다. 이 때문에 중소기업은 한 번의 사고로 존립이 흔들리고, 대기업은 형식적인 ‘책임 회피 매뉴얼’을 만든다.
법은 안전을 강화하기 위해 만들어졌지만, 실제로는 기업을 방어적으로 만들고, 안전관리의 본질을 왜곡시킨다. 정부는 이제 이 구조를 현실적으로 고쳐야 한다. 사업장 규모와 공사 특성에 따라 책임을 차등화하고, 예방조치 이행 여부를 중심으로 판단하는 제도적 균형이 필요하다.
100명이 일하는 현장과 1만명이 일하는 현장이 같은 확률의 위험을 가진다고 볼 수는 없다. 안전을 강화하되, 법의 무게를 기업이 감당할 수 있는 수준으로 조정해야 한다. 이를 위해 외국의 사례를 참고해 ‘결과 처벌형’에서 ‘예방 평가형’으로 전환하는 입법 개정이 시급하다.
평등은 결과를 똑같이 만드는 것이 아니라, 각자의 조건 속에서 공정한 기준을 세우는 것이다. 중대재해처벌법은 이제 그 평등의 정의를 다시 써야 한다. 정부가 현실을 직시하고, 법의 균형점을 새로 세워야 할 때다.
법은 두려움이 아니라 신뢰 위에서 작동해야 한다. 기업이 공포에 떠는 나라에서는 결코 안전이 자라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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