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경제 17주년 특별기획] 서울 토박이가 말하는 진짜 '서울 이야기'(23)
지금도 치열한 삶의 현장 '서울의 시장', 한국 최초의 대규모 시장 '남대문시장'
김병윤 기자
bykim7161@hanmail.net | 2022-03-22 23:47:41
서울은 1392년 조선이 건국된 이래 600년 넘게 수도의 자리를 지키고 있다. 서울은 그렇게 우리나라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중심지였다. 서울을 이해한다는 건 결국 우리의 과거, 현재, 미래에 다가선다는 뜻일 게다. 이 연재는 '찐 서울 토박이'자 '대한민국 연예1호' 기자로 불리는 정홍택 선배의 구술을 기초 삼아 김병윤 대기자가 꼼꼼히 현장을 누비며 쓴 글이다. 김 병윤 대기자가 전하는 생동감 넘치는 서울 이야기를 '토요경제 17주년 특별기획'으로 본지에서 매주 2회 독자에게 전하려 한다. [편집자 주]
지금도 치열한 삶의 현장 '서울의 시장'
▲ 시장 <사진=김병윤 대기자>
시장은 삶의 터전이다. 정이 넘친다. 싸움도 있다. 화해도 한다. 흥정도 이뤄진다. 하루에도 천태만상의 일이 벌어진다. 인생의 축소판이다. 기쁨도 있고 슬픔도 느낀다. 위로도 해준다. 도움도 받는다. 나누기도 한다. 인간사에 꼭 필요한 장소다. 시장을 통해 모두가 거래된다. 도시와 시골에 모두 있다. 서울은 큰 도시다. 도시가 큰 만큼 시장도 많다. 동네마다 시장이 있다. 셀 수도 없다. 규모가 작다. 큰 시장도 있다.
외국에도 널리 알려져 있다. 관광객이 몰려든다. 외국인도 구경을 온다. 물건도 많이 구입해 경제에 도움이 된다. 서울을 대표하는 시장이 있다. 전통도 있고 역사도 깊다.
한국 최초의 대규모 시장 '남대문시장'
일제 강점기에 생성됐다. 처음에는 대형시장이 아니었다. 일제 말엽에 규모가 커졌다. 한국과 일본사람이 혼재했다. 모든 생활필수품이 있었다. 특히 식재료가 많았다. 푸줏간(정육점)이 있었다. 싱싱한 고기를 팔았다. 수산시장도 인기를 끌었다. 생선도 싱싱했다. 인천에서 주로 들어왔다. 연평도 조기가 좌판에 놓였다. 굴. 새우젓도 풍부했다. 값도 저렴했다. 생선을 사는 발걸음이 끊이지 않았다. 지금은 수산시장이 없다.
공연장도 있었다. 짧은 공연으로 고객의 발길을 잡았다. 식당이 많았다. 요즘 같은 식당이
아니다. 선술집 형태였다. 음식이 풍부했다. 인심이 좋았다. 술값이 쌌다. 밥도 푸짐하게 줬다. 배고픔을 달래기에 좋았다. 피로를 풀기에도 최고였다. 종류도 다양했다. 골라먹는 재미가 있었다. 식당은 지금도 많다. 그때 그 시절 식당도 있다. 50년이 넘는 식당이다.
남대문시장을 대표한 게 있다. 지게꾼이다. 지게로 물건을 옮겨주는 사람이다. 남대문지게꾼이라는 말이 있었다. 대단한 집단이었다. 아무나 하지 못 했다. 이권이 달려있었다. 규율도 엄격했다. 마음대로 짐을 질 수 없었다. 순번대로 짐을 졌다. 어려웠던 시절에 생계를 책임져 주었다. 가족의 운명을 짊어지고 있었다. 일자리가 귀하던 시절이었다. 노는 사람에게 말했다. “하다 못 해 지게라도 지지”라고 했다. 그만큼 쉽게 일 할 수 있는 직업이었다. 마지막 생활전선이었다.
세월이 흘러 이동수단도 발달했다. 짐을 편히 나르고 싶었다. 한 번에 많이 옮길 필요성도 생겼다. 리어카가 등장했다. 운송수단의 발전이었다. 우마차도 사용됐다. 소달구지다. 지금은 상상이 안 간다. 서울시내 한 복판에 소마차라니. 동화 같은 얘기다.
남대문 시장의 골칫거리도 있었다. 주먹패들이었다. 보스급 주먹은 아니다. 중간급건달이었다. 패싸움이 수시로 일어났다. 세력싸움이었다. 다행스런 일이 있었다. 절대 흉기를 사용하지 않았다. 주먹으로만 싸웠다. 낭만이 있던 시절이었다. 걸인도 많았다. 동냥을 달라고 구걸했다. 걸인을 무시하면 안 됐다. 장사를 방해했다. 폭력을 행사했다. 달래는 게 최고의 방법이었다.
명물도 있었다. 동동구리무 장사였다. 크림을 구리무라 불렀다. 수제화장품이었다. 품질은 증명이 안 됐다. 화장품이 귀하던 시절 얘기다. 요즘 같으면 난리가 날 일이다.머리 하얀 할아버지가 팔았다. 러시아계 사람이었다. 북을 치며 동동 소리를 냈다. 시장사람 모두가 알아봤다. 인사성도 밝았다. 상인들에게 웃음을 줬다. 돈을 꽤 많이 벌은 것으로 알려졌다. 어쩌면 뷰티 한류의 원조일 수도 있다.
남대문시장은 역사적 의미가 있다. 시장을 중심으로 하나의 도시가 생겼다. 경제의 중추적 역할을 했다. 서울 시민에게 중요한 시장이다. 서울 시민이라면 한 번은 가봤다. 시장구경을 하려고 발품을 팔았다. 최초의 대규모 시장이다. 다양한 외국상품을 선 보였다. 지금도 수입상품을 많이 판다. 그래서 다른 이름으로 불리기도 한다. 도깨비시장이라 부른다.
토요경제 / 김병윤 대기자 bykim7161@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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