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리아의 문화산책] 화가 양진아, 꽃은 장식 아닌 감정의 얼굴
분홍·청록 사이 쌓아 올린 기다림과 희망
고향 대구 첫 개인전 '늦여름, 가장 다정한 빛’
마리아김 칼럼니스트
kimjjyy10@gmail.com | 2026-08-30 22:19:50
꽃이 얼굴을 가린다. 여인은 눈을 감았고 머리 위에는 분홍 장미가 한 계절처럼 피어 있다. 다른 화면에서는 바이올린과 첼로가 울리고 그 곁을 고양이가 지킨다.
화가 양진아의 그림은 얼핏 사랑스럽다. 꽃과 여인, 고양이와 강아지, 분홍빛 소파까지 익숙하고 편안한 것들이 화면을 채운다. 그러나 조금 오래 바라보면 이 그림의 중심은 '예쁜 대상'이 아니라 그 대상 사이에 머무는 감정이라는 사실이 보인다.
양진아 회화에서 먼저 시선을 잡는 것은 색이다. 분홍과 청록이 반복된다. 따뜻한 분홍은 장미와 옷, 소파에 번지고 차가운 청록은 인물 주변의 공간을 넓힌다. 두 색은 서로를 밀어내는 대신 상대를 더 선명하게 만든다. 화면의 온도를 결정하는 것은 사물의 고유색보다 색과 색의 관계다.
미술사에서 색이 현실을 정확하게 묘사하는 수단에서 벗어나 감정을 만드는 독립적 요소가 된 것은 현대회화의 중요한 전환이었다. 마티스는 색과 선을 결합하며 자신이 원하는 회화를 '균형과 순수, 평온'에 가까운 것으로 설명했다. 뉴욕현대미술관(MoMA)은 그의 작업을 현실의 색을 복제하기보다 색 자체로 화면을 구성하는 과정으로 설명한다.
양진아의 그림을 마티스의 계보에 직접 놓을 수는 없다. 다만 색을 현실 재현보다 정서의 장치로 사용하는 점에서는 흥미로운 접점이 생긴다. 양진아의 분홍도 단순한 꽃의 색이나 여성성을 나타내는 기호에 머물지 않는다. 기억의 온도이고, 기다림이며, 자신이 그리고 싶은 세계의 분위기를 결정하는 색이다.
작품 속 꽃은 더욱 그렇다. 한 그림에서는 여인이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눈을 감았다. 머리 위 거대한 꽃다발은 실제 꽃꽂이라기보다 인물의 내면이 밖으로 부풀어 오른 것처럼 보인다. 얼굴보다 꽃이 더 많은 공간을 차지한다.
또 다른 여인의 얼굴은 장미에 절반쯤 가려져 있다. 초상화라면 가장 중요해야 할 얼굴을 오히려 꽃이 침범한다. 그래서 꽃은 인물을 꾸미는 장식이 아니라 인물이 말하지 않는 감정을 대신 보여주는 또 하나의 얼굴이 된다.
여기서 양진아 그림의 '장식성'을 단순한 예쁨과 구별해 볼 필요가 있다. 19세기 말 프랑스 나비파는 회화를 현실을 들여다보는 창처럼 만드는 전통적 원근법에서 벗어나 평평한 화면 위 색과 패턴, 질감 자체에 의미를 부여했다. 나비파 화가 모리스 드니는 회화가 말을 그리거나 누드를 그리기 이전에 본질적으로 색이 일정한 질서에 따라 놓인 평평한 표면이라고 봤다. 메트로폴리탄미술관도 나비파의 장식성을 깊이의 환영을 줄이고 색면과 무늬, 붓질의 표면을 강조한 미학으로 설명한다.
양진아의 꽃과 배경을 볼 때도 이 구분이 유효하다. 인물과 동물은 비교적 구체적으로 묘사한다. 반면 그 뒤의 공간은 현실에서 멀어진다. 청록과 분홍, 회색과 노랑이 넓은 색면으로 겹치고 유화 물감의 붓질과 긁어낸 듯한 흔적이 남아 있다. 배경은 어느 방이나 거리의 정확한 묘사가 아니라 감정이 머무는 공간에 가깝다.
사실적인 형상과 추상적 표면이 한 화면에서 만나는 것이다. 특히 바이올린을 연주하는 인물을 그린 대작에서 이 구조가 선명하다. 흰옷을 입은 연주자와 바이올린은 상당히 구체적이다. 그러나 그 뒤에는 분홍·청록·노랑의 색면이 건축적 형태처럼 겹쳐 있다. 연주자 아래 고양이 두 마리는 관객을 정면으로 바라본다.
연주자의 시간과 고양이의 시간이 다르다. 활을 움직이는 연주자는 진행 중인 시간 안에 있지만 고양이들은 움직임을 멈춘 채 화면 밖을 응시한다. 동적인 음악과 정적인 시선이 충돌하면서 화면에 묘한 긴장이 생긴다.
첼로를 연주하는 여인과 창가의 고양이를 그린 작품에서는 시선이 이야기를 만든다. 화면 한가운데 거대한 첼로가 자리하지만 여인의 관심은 악기에만 있지 않다. 얼굴은 창가의 고양이를 향한다. 고양이는 다시 화면 밖을 바라본다. 사람과 동물, 관객 사이에 서로 다른 시선의 선이 생긴다.
음악은 그림에서 들리지 않는다. 그런데 양진아는 연주자의 자세와 악기, 정지된 고양이를 한 화면에 배치하면서 오히려 소리가 끝난 뒤 남는 정적을 그린다.
고양이만 등장하는 그림은 더 단순하다. 분홍색 소파 한가운데 흰 고양이가 앉아 있다. 벽 위에서 비스듬히 떨어지는 빛이 공간을 둘로 가른다. 다른 작품에서는 같은 계열의 분홍 소파 위에 노란 고양이가 몸을 늘어뜨린 채 잠들어 있다.
별다른 사건은 없다. 바로 그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시간'이 중요하다.
작가는 작업노트에서 "기다림은 언제나 내 그림의 시작이었다"고 썼다. 이어 "나의 그림 속 기다림은 외로움이 아니라 희망이며 끝이 아니라 가장 다정한 시작"이라고 했다.
그 말을 작품에 대입하면 반복되는 소재의 의미도 달라진다. 창가의 고양이는 무엇인가를 기다리고, 눈을 감은 여인은 자신의 안쪽으로 물러나 있다. 연주자는 아직 음악을 끝내지 않았다. 잠든 고양이에게 시간은 잠시 멈춰 있다. 양진아의 화면에는 사건보다 사건 사이의 시간이 많다.
꽃·고양이·분홍색은 자칫 감상적인 이미지로만 소비될 수 있는 소재다. 양진아가 이를 회화로 붙잡는 것은 화면의 표면이다. 긁히고 겹쳐진 배경의 마티에르, 사실적 인물과 비재현적 색면의 충돌이 지나치게 달콤해질 수 있는 이미지를 붙잡아 둔다.
그래서 '늦여름, 가장 다정한 빛'이라는 제목에서 중요한 단어는 '다정한'보다 어쩌면 '늦여름'일 수 있다.
늦여름은 두 계절 사이의 시간이다. 한 계절은 아직 끝나지 않았지만 다음 계절은 이미 가까이 와 있다. 기다림과 변화가 동시에 존재한다.
화가 양진아가 작업노트에서 "우리는 누구나 마음속에 저마다의 계절을 품고 살아간다"고 한 것도 같은 맥락으로 읽힌다.
그의 화면에서 꽃은 언젠가 시들 존재이고 음악은 결국 끝난다. 빛도 자리를 옮긴다. 그러나 그림은 그 사라지기 직전의 순간을 붙잡는다.
양진아가 그리는 희망은 그래서 거창하지 않다. 창가의 빛 한 줄기, 잠든 고양이, 얼굴을 덮은 꽃, 음악을 듣는 조용한 시간처럼 일상에서 잠깐 나타났다 사라지는 것들에 가깝다.
늦여름이 아름다운 것도 아마 같은 이유일 것이다.
곧 지나갈 것을 알기 때문에 빛은 조금 더 오래 보인다.
양진아는 오는 9월 1~6일까지 대구 대백프라자갤러리 B관에서 개인전 '늦여름, 가장 다정한 빛'을 연다. 고향 대구에서 처음 갖는 개인전으로 신작 100호 두 점을 비롯해 기존 작품과 소품을 함께 선보인다.
토요경제 / 마리아김 칼럼니스트 kimjjyy10@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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