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경제 17주년 특별기획] 서울 토박이가 말하는 진짜 '서울 이야기'(19)
음악 감상실. 대중문화의 선구자 '세시봉', 음악 감상실. 대중문화의 선구자 '세시봉'
김병윤 기자
bykim7161@hanmail.net | 2022-03-08 23:43:10
서울은 1392년 조선이 건국된 이래 600년 넘게 수도의 자리를 지키고 있다. 서울은 그렇게 우리나라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중심지였다. 서울을 이해한다는 건 결국 우리의 과거, 현재, 미래에 다가선다는 뜻일 게다. 이 연재는 '찐 서울 토박이'자 '대한민국 연예1호' 기자로 불리는 정홍택 선배의 구술을 기초 삼아 김병윤 대기자가 꼼꼼히 현장을 누비며 쓴 글이다. 김 병윤 대기자가 전하는 생동감 넘치는 서울 이야기를 '토요경제 17주년 특별기획'으로 본지에서 매주 2회 독자에게 전하려 한다. [편집자 주]
음악 감상실. 대중문화의 선구자 ‘세시봉’
다방에서 발달했다. 한국대중문화의 선구자이다. 르네상스, 세시봉, 쉘부르, 돌체, 청기와 디 쉐네가 유명했다. 규모는 르네상스가 제일 컸지만 영향력은 세세봉이 컸다.
명동에 있다 무교동으로 이전했다. 유명 가수를 많이 배출했다. 새로운 문화도 창출했다. 초기에 유명가수들이 공연을 했다. 패티김, 이미자, 최숙자, 현미, 한명숙, 이금희, 박재란, 신중현과 에드포 등이다. 보컬 그룹도 있었다. 포 클로버스다. 최희준, 박형준, 위키 리, 유주용으로 구성됐다. 세시봉은 초기에 대중가요 가수의 공연장이었다. 세시봉은 포크송 가수의 데뷔 무대였다. 이름만 들어도 화려하다. 조영남, 윤형주, 송창식, 이장희, 김상희 등이 세시봉 출신이다. 이들은 1970년대 한국문화를 주도했다. 과거와 완전 다른 문화였다. 격식에서 벗어나려 했다. 권위의식을 떨치려 했다.
청바지를 입고 기타를 둘러맸다. 머리를 길게 기르고 외국 곡을 불렀다. 번안가요로 팬들을 사로잡았다. 기존의 음악 장르와 달랐다. 새로웠다. 신선했다. 자유스런 영혼을 찾은 듯했다. 70년대는 암울했다. 사회가 어두웠다. 독재에 억눌려 있었다. 어딘가에서 탈출구를 찾고 싶었다. 독재에 항거하고 싶었다. 세시봉 가수들은 음악을 통해 길을 제시했다. 청춘들은 열광했다. 그들을 따라했다. 기타가 불티나게 팔렸다. 여기저기서 기타소리가 들렸다. 캠퍼스에 모여 앉아 기타를 쳤다. 골목에서도 기타 줄을 튕겼다. 산동네의 고달픈 삶도 기타 소리가 위로해줬다. 밤바다에도 울려 퍼졌다. 합창소리와 함께. 밤바다의 파도소리도 화음을 맞춰줬다.
거리는 푸른색 물결이었다. 청바지 품귀현상까지 일어났다. 서부개척 시대를 보는 듯했다. 바지만은 그랬다. 미국사회를 옮겨 놨다. 긴 머리도 유행했다. 남자들도 머리를 길렀다. 남녀 구분이 안 될 정도였다. 기성세대는 한 숨을 쉬었다. 무엇하는 짓들이냐고. 장발단속이 심했다. 단속경찰과 쫓고 쫓기는 싸움도 했다. 청춘들은 그마저도 즐겼다. 독재에 대한 저항수단으로. 세시봉의 가수들도 수난을 당했다. 장발의 원조로 인식돼 방송출연이 금지됐다. 대마초 사건으로 감옥에도 갔다. 그들의 잘잘못은 논외로 하자. 그들이 대중문화에 끼친 영향은 인정하자.
세시봉의 위상은 대단했다. 성점감상실이 있었다. 노래를 평가하는 제도다. 기존의 곡들을 평가했다. 초대받은 가수가 노래를 듣고 점수를 매겼다. 노래를 부른 가수는 긴장했다. 평가 점수에 신경을 곤두 세웠다. 곡의 운명이 결정될 수도 있었다. 신곡합평회도 있었다. 신곡이 나오면 갖고 와 평가를 받았다. 좋은 점수가 나오면 앞길이 밝았다. 세시봉이라 가능했던 일이다. 세시봉은 단순한 음악 감상실이 아니었다. 한국대중문화의 산실이었다.
오비스캐빈도 사랑받았다. 무대와 객석이 있었다. 70년대에는 신선한 충격이었다. 가수와 관객이 함께 할 수 있었다. 그룹사운드를 무대에 세웠다. 키 보이스 등이 활동했다. 당시에는 그룹사운드가 100여 개에 이르렀다. 하트 투 하트도 있었다. 조용한 멜로디의 노래를 불렀다. 그룹사운드 분위기와 달랐다. 이석, 은희 등이 무대에 올랐다. 통기타를 쳤다. 잔잔한 음악이 흘렀다. 애플와인을 주로 마셨다. 연인이 많이 찾았다. 분위기 잡기 좋은 장소였다.
극장식 비어홀
이름 그대로다. 맥주를 마셨다. 춤은 안 추고 공연을 보았다. 영화를 보듯이. 1950년대 말에 드물게 있었다. 60년대에 폭발적 인기를 끌었다. 몇 곳이 유명했다. 역사의 장소도 있었다. 미스 싸롱이라는 비어홀이다. 당시에는 살롱을 싸롱이라 했다. 5.16의산실이다. 김종필, 박종규 등이 작전회의를 했다. 한 쪽 구석방에 모여 앉아 맥주를 마시며 의논했다. 발각되지 않으려고 모였던 장소였다. 비어홀이 5.16의 주요 역할을 했다.
비어홀은 70년대에 전성기를 맞았다. 많은 업소가 문을 열었다. 경쟁도 치열했다. 무랑루즈, 엠파이어, 월드컵, 라스베가스, 패시픽호텔 비어홀 등이 유명했다. 무랑루즈가 최고 인기였다. 코미디언 이주일이 출연했다. 이주일의 인기는 상상을 초월했다. 남녀노소 구분 없이 모두가 좋아했다. 이주일의 말 한마디는 유행어가 됐다. 우스꽝스러운 몸짓에 배꼽을 잡았다. 국민체조보다 더 많이 따라했다. 초등학생의 걸음걸이가 바뀌었다. 이주일의 오리걸음 식으로. 국민은 TV에 모여 앉았다. 이주일의 코미디를 보기 위해.
이주일에게 별명이 있었다. 코미디의 황제라고. 정말 황제 대접을 받았다. 여기저기서 붙잡으려 했다. 시간이 없었다. 눈 코 뜰 새가 없었다. 그런 이주일이 무랑루즈에출연했다. 흥행은 따 논 당상이었다. 무랑루즈는 문전 성시였다. 인산인해였다. 이주일 쇼를 보려고 계를 만들었다. 전국에서 올라왔다. 시골 아낙네도 바쁜 일손을멈췄다. 이주일이 무대에 서면 난리가 났다. 환호와 웃음과 박수소리가 요란했다.
이주일은 손님에게 기쁨을 주고 웃음을 선사했다. 국민 코미디언 이주일은 세상을 떠났다. 60대 젊은 나이에. 모두에게 웃음을 안겨주고 이별했다. 정말 안타까운 일이다. 월드컵도 손님이 많았다. 돈을 꽤 벌었다. 정 아무개 사장이 특이했다. 월드컵 선수들을 돕겠다고 했다. 월드컵으로 돈을 벌었다고. 얼마나 도왔는지는 모를 일이다.
연예사업에서는 큰일도 했다. 가수를 육성하겠다고 했다. 월드컵 엔터프라이즈를 설립했다. 지금의 SM 등 연예기획사 형태였다. 선견지명이 있었다. 신인가수 선발도 했다. 이때 발굴된 가수가 혜은이다. 신인선발대회에 1000여 명이 모였다. 조그맣고 예쁜 지원자가 있었다. 목소리도 특이했다. 약간 허스키 했다. 김승주였다. 혜은이의 본명이다.
토요경제 / 김병윤 대기자 bykim7161@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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