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경제 17주년 특별기획] 서울 토박이가 말하는 진짜 '서울 이야기'(12)

특이한 서울술 '삼해주', 외로운 이의 친구 '소주'

김병윤 기자

bykim7161@hanmail.net | 2022-02-11 23:17:51

서울은 1392년 조선이 건국된 이래 600년 넘게 수도의 자리를 지키고 있다. 서울은 그렇게 우리나라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중심지였다. 서울을 이해한다는 건 결국 우리의 과거, 현재, 미래에 다가선다는 뜻일 게다. 이 연재는 '찐 서울 토박이'자 '대한민국 연예1호' 기자로 불리는 정홍택 선배의 구술을 기초 삼아 김병윤 대기자가 꼼꼼히 현장을 누비며 쓴 글이다. 김 병윤 대기자가 전하는 생동감 넘치는 서울 이야기를 '토요경제 17주년 특별기획'으로 본지에서 매주 2회 독자에게 전하려 한다. [편집자 주]


특이한 서울 술 ‘삼해주(三亥酒)’ 

▲ 삼해주<사진=김병윤 대기자>

 

삼해주는 고급 술이다. 음력 정월 첫 해일(亥日)에 담갔다. 해일은 돼지날이다. 해일은 12일 또는 36일 간격으로 돌아온다. 그 해일에 3번 술을 안친다. 삼해주의 어원이다. 

 

삼해주는 사대부 집에서 빚었다. 부유층이 아니면 빚기 힘들었다. 많은 쌀을 사용했다. 계절적 요인도 있었다. 음력 정월에 담갔다. 쌀이 귀한 시기였다. 보릿고개로 연명해야 했던 시절이었다. 평민은 먹고 살기 바빴다. 술 만들 생각은 엄두도 못 냈다. 부유층만의 전유물이었다. 백성은 상소까지 올렸다. 삼해주의 폐해를 막아달라고. 술 빚는데 쌀이 너무 소비되었다.

삼해주의 폐해는 1960년대 한국에서도 있었다. 박정희 대통령 시절이었다. 쌀이 모자랐다. 수입할 돈도 없었다. 배고픔에 굶주렸다. 가난한 나라의 현실이었다. 가정에 술독 한 개씩은 있었다. 국민은 술로 시름을 달랬다. 술은 쌀에서 나온다. 

 

정부는 특단의 조치를 내렸다. 술 제조 금지령을 선포했다. 쌀을 지키기 위해서다. 정말로 고단했던 시절이었다. 이제는 모두 잊고 살아간다. 잊지 말아야 한다. 아픈 과거를 잊으면 안 된다. 아주 오래 된 과거도 아니다. 불과 50년 전 얘기다. 

 

쓰라렸던 시절이 돌아올 수도 있다. 두렵다. 현실이 그런것같다. 술에 취해 비틀대는 모습 같다. 술은 약이자 독이다. 기분이 좋으면 약이다. 취해서 비틀거리면 독이다. 술의 양면성이다. 교훈을 삼아야 한다. 삼해주는 술 빚는 시간이 오래 걸린다. 백일주라고 부를 정도였다. 과정도 까다롭다. 실패할 확률도 높았다. 

 

부유층의 술이 된 이유가 또 있다. 안주였다. 삼해주의 안주는 소고기였다. 수육 아니면 육회였다. 안주마저 평민이 접하기 어려웠다. 술을 빚는데 불변의 법칙이 있다. 좋은 술은 좋은 물에서 나온다. 좋은 지하수를 사용해야 한다. 지금 물로는 옛 맛이 안 난다.


외로운 이의 친구 ‘소주(진로)’

▲ 진로소주 <사진=김병윤 대기자>

소주는 옛날부터 있었다. 증류식으로 내렸다. 우리나라 전통술 제조 방식이다. 희석식 소주가 생산됐다. 진로 소주였다. 그 전에도 소주는 팔았다. 항아리에 술을 담았다. 필요할 때 병에 넣어 판매했다. 소위 막소주였다. 값도 쌌고 도수도 높았다. 취하기 딱 좋아 서민의 사랑을 받았다.

막소주를 대중화시킨 기업인이 있었다. 진로소주의 창업자 장학엽 씨다. 장학엽은 평안도 용강 출신이다. 일제시대에 가내공업식으로 소주를 빚었다.

 

장학엽은 1954년 영등포에 터를 잡았다. 서광주조를 창업했다. 진로 소주를 생산했다. ‘참진(眞) 이슬로(露)’상표를 붙였다. 막소주보다 고급스러워 보였다. 비싸게 팔았다. 비싸도 날개 돋친 듯 팔렸다. 고객은 대접받는 기분이었다. 고가 마케팅이 성공했다. 퇴근길 직장인의 친근한 벗이 됐다. 상표는 두꺼비였다. 술집 여기저기서 주문 소리가 들렸다. 이모 여기 두꺼비 하나요. 한국 소주의 대명사로 자리 잡았다.

진로의 마케팅은 적극적이었다. 이런 애기도 있다. 확실치는 않다. 아마도 맞을 거다. 회사에서 직원에게 돈을 줬다. 술값을 주는 것이었다. 저녁마다 술집을 돌게 하며 진로 소주를 주문했다. 없다하면 곧바로 나오게 했다. 이런 일이 반복되니 주인은 어리둥절했다. 

 

진로 소주가 무언데. 주인들은 고민했다. 진로 소주 값이 비싸서. 그래도 어쩔 수 없었다. 손님들이 찾는데. 울며 겨자 먹기로 들여 놓았다. 걱정은 기우였다. 손님은 계속 진로를 찾았다. 장사가 잘 됐다. 누이좋고 매부 좋은 일이 됐다.

 


진로 소주는 술집을 점령했다. 가정에도 파고들었다. 회사의 마케팅은 더 집요해졌다. 1959에 CM송을 제작했다. “야야야야야야 차차차 너도 진로 나도 진로” 한국 최초의 CM송 이었다. 대성공이었다. 어린이부터 어른까지 부르고 다녔다. 어디를 가도 진로 CM송이 흘러나왔다. 진로는 소주 시장만 점령한게 아니었다. 우리의 생활 속에 있었다.


이런 진로 소주도 부침이 많았다. 경영권 분쟁. IMF 사태를 맞으며 막을 내렸다. 안타까운 일이다. 상표는 그대로 남아있다. 주인이 바뀌었을 뿐이다. 다행이다. 진로 소주는 서울의 술이 아니다. 그래도 서울의 술로 꼽은 이유가 있다. 

 

진로 소주는 서울에서 널리 퍼졌다. 서울을 기반으로 대중화됐다. 소주는 여러 상표가 있다. 각 지역에서 생산하고 있다. 맛은 지역마다 다를 수 있다. 지역의 특색을 담고 있다. 분명한 것이 있다. 소주는 한국인과 함께 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토요경제 / 김병윤 기자 bykim7161@hanmail.net 

[ⓒ 토요경제. 무단전재-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