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이츠 방한…SMR 협력, ‘연료 공급망’으로 번지나
총리실 면담 요청, 기업 회동 넘어 정책 의제 가능성
SK·한수원·두산에너빌리티·HD현대 참여 속 HALEU가 새 변수
임종호 기자
yimjongho1969@gmail.com | 2026-07-31 16:29:05
빌 게이츠의 방한 추진을 계기로 한국과 테라파워의 소형모듈원자로(SMR) 협력이 기자재 제작을 넘어 핵연료 공급망 문제로 확장될 수 있다는 관측이 나온다. 한국 기업들은 이미 테라파워 사업에서 투자, 기자재 제작, 건설, 운영 협력에 들어갔다. 그러나 원자로 가동에 필요한 고순도 저농축우라늄(HALEU) 공급망에서는 아직 뚜렷한 역할이 확인되지 않고 있다.
게이츠 측은 이르면 8월 방한을 위해 최근 총리실에 면담을 요청한 것으로 알려졌다. 구체적인 일정과 의제는 조율 중이다. HALEU가 공식 의제로 확인된 것은 아니지만, 업계에서는 총리실 면담 요청 자체가 단순한 기업 회동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고 본다. SMR 협력은 원전 기자재 수주만으로 끝나는 사업이 아니라 연료 조달, 인허가, 한·미 원자력협정, 공급망 안보와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
테라파워 사업은 이미 실증 단계에서 양산 단계로 넘어가고 있다. 테라파워는 지난 3월 미국 원자력규제위원회(NRC)로부터 와이오밍주 케머러 1호기 건설허가를 받았고, 4월 원자로 건설을 공식 시작했다. 메타와는 최대 8기의 나트륨(Natrium) 원자로를 개발해 기저전력 2.8GW, 저장장치 가동 시 최대 4GW를 공급하는 계약을 맺었다. 첫 후속 호기 공급 목표는 2032년이다.
나트륨 원자로는 우라늄-235 농축도가 5%를 넘고 20%에는 못 미치는 HALEU를 사용한다. 기존 대형 경수로가 주로 쓰는 저농축우라늄보다 농축도가 높다. 원자로를 작게 만들고 연료 교체 주기를 늘릴 수 있지만, 농축과 전환, 금속화, 연료 제조, 운송시설을 별도로 갖춰야 한다.
HALEU는 테라파워 일정에도 이미 영향을 미쳤다. 테라파워는 당초 케머러 1호기 가동 목표를 2028년으로 잡았지만 2030년으로 늦췄다. 러시아에 의존하던 HALEU 조달이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어려워진 영향이 컸다. 원자로 기술과 건설 계획이 있어도 연료 공급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상업화 일정이 지연될 수 있다는 점을 보여준 사례다.
미국 내 공급능력도 아직 초기 단계다. 미국 에너지부는 정부 보유 물량과 재고를 활용해 2026년 6월까지 총 21t을 공급 가능한 상태로 만들겠다는 목표를 세웠다. 테라파워 설계 기준 초기 노심 장전량은 약 13tU로 추산된다. 센트러스가 지난 6월까지 생산한 HALEU 육불화우라늄(UF6)은 누적 1.9t 수준이다. 물질 형태와 집계 기준이 달라 단순 비교는 어렵지만, 다수 호기를 안정적으로 뒷받침할 상업 생산체계는 아직 완성되지 않은 것으로 평가된다.
한국 기업의 테라파워 참여는 기자재와 사업개발 분야에 집중돼 있다. SK는 2022년 테라파워에 2억5000만달러를 투자했다. 한국수력원자력은 올해 1월 SK 투자분 일부를 인수해 테라파워 주주로 합류했다. 두산에너빌리티는 케머러 1호기에 들어갈 원자로 보호용기, 원자로 지지구조물, 노심 동체구조물 제작에 참여한다. HD현대중공업은 나트륨 원자로 격납계통 부품의 우선 제작사로 선정됐다. HD현대와 현대건설은 후속 원자로의 설계, 제작, 건설, 금융조달까지 검토하고 있다.
반면 연료 공급망은 미국과 동맹국 중심으로 구축되고 있다. 테라파워는 센트러스와 HALEU 공급을 협의했고, 남아프리카공화국 농축시설을 추진하는 ASP아이소토프스에도 투자했다. 프라마톰은 미국 워싱턴주 리치랜드에서 우라늄 금속화 공정을 개발하고 있다. 공개된 계약만 보면 한국 기업이 이 연료사슬에 포함된 정황은 아직 확인되지 않는다.
한국에 핵연료 제조기술이 없는 것은 아니다. 한전원자력연료는 국내 경수로와 중수로용 핵연료를 생산하고 있다. 다만 경수로 연료는 산화물 세라믹 펠릿이고, 나트륨 원자로는 HALEU 금속연료를 쓴다. 탈전환, 금속화, 연료봉 제작, 저장·운송, 품질검증 체계가 별도로 필요하다. 여기에 한·미 원자력협정과 국제원자력기구(IAEA) 안전조치, 원자력안전위원회 인허가 문제도 함께 따라붙는다.
이 때문에 총리실 면담 조율은 기업 간 협력 이상의 정책 신호로 해석된다. 빌 게이츠가 한국 기업의 제작능력만 확인하려는 것이라면 개별 기업 회동으로도 충분하다. 그러나 HALEU 도입, 금속연료 제조 참여, 해외 생산시설 지분투자, 장기 구매권 확보는 기업 단독으로 결정하기 어렵다. 정부 간 협의와 규제 체계가 함께 움직여야 하는 영역이다.
오는 9월 11일 시행되는 SMR 특별법도 연료 문제를 비켜가기 어렵다. 이 법은 5년 단위 기본계획과 연구개발특구, 실증 지원, 전문인력 양성, 국제협력 근거를 담고 있다. 원자로 개발 일정뿐 아니라 필요한 HALEU 물량, 도입 시점, 해외 공급처, 국내 가공 가능 분야, 운송·저장시설, 규제 기준을 함께 검토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오는 배경이다.
연료 공급망은 기자재 수주보다 장기성이 크다. 원자로 용기와 구조물 매출은 건설 기간에 집중된다. 반면 핵연료는 원자로가 가동되는 동안 계속 조달해야 한다. 초기 연료 설계와 품질인증에 참여한 기업은 후속 호기와 교체 연료 사업에서도 유리한 위치를 차지할 수 있다. 메타 계약처럼 후속 원자로가 여러 기로 확대될 경우 연료 사업의 의미는 더 커진다.
업계에서는 한국이 당장 독자 농축시설을 추진하기보다 농축 이후 공정부터 참여하는 방안이 현실적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탈전환, 금속화, 연료봉 제작, 품질검증, 운반용기와 저장시설은 농축 자체보다 협력 가능성이 큰 분야로 꼽힌다. 한전원자력연료의 제조·품질관리 경험과 한국원자력연구원의 소듐냉각고속로 연구를 테라파워·프라마톰의 금속연료 공정과 연결하는 방식도 거론된다.
해외 HALEU 생산시설에 지분을 투자하고 장기 구매권을 확보하는 방안도 선택지로 거론된다. 테라파워가 남아프리카공화국 농축시설 투자와 연료 구매를 함께 추진하는 방식이 참고 사례다. 국내 농축권 논의는 장기 과제로 두되, 단기적으로는 미국 또는 동맹국 생산시설의 물량을 확보하는 방식이다.
결국 게이츠 방한의 관전 포인트는 총수 회동이나 단기 원전주 상승 여부에 그치지 않는다. SK, 한수원, 두산에너빌리티, HD현대중공업, 현대건설이 테라파워 사업에서 어떤 역할을 확보할지가 핵심이다. 특히 한국 기업이 기자재 제작을 넘어 후속 원자로마다 반복되는 연료 공급망에 어느 정도 참여할 수 있을지가 향후 협력의 질을 가를 변수로 떠오르고 있다.
토요경제 / 임종호 기자 yimjongho1969@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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