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문화가 미래다] 중국 골드미스생활 포기하고 한국남성과 결혼한 무융흄씨

결혼이주민 무융흉 씨 "빨리 집을 장만해 한국에서 부모님 모시며 살고 싶어요."
한국생활 12년째...부모님이 그립지만 한국문화·생활방식 이해하며 적응 위해 노력
다문화지원센터통해 한국어, 컴퓨터, 바리스타 등 수강하면서 다문화 친구들과 교류

김병윤 기자

bykim7161@hanmail.net | 2022-09-14 11:39:25

▲ 무융흉 씨의 가족들 남편 정봉훈 씨, 첫째 정지은, 둘째 정지호 <사진=무융흉 제공>

 

“부모님이 정말 보고 싶어요. 엄마 생각만 하면 눈물이 나요. 아버지도 건강이 안 좋으세요. 코로나 땜에 몇 년간 못 뵙고 있어요. 엄마 생각에 밤마다 울곤 해요. 부모님 정을 뼈저리게 느끼고 있습니다.” 결혼이주민의 사모곡이다. 

 

한국생활 12년 째. 중국며느리의 애달픈 사연이다. 눈물의 주인공은 무융흉(44) 씨다. 중국 랴오닝성 푸순 출신이다.

세자매 중 막내다. 부모님의 사랑을 듬뿍 받았다. 경제적 어려움 없이 자랐다. 중국에서 미용사로 일했다. 수입도 괜찮았다. 결혼할 마음도 없었다. 골드미스 생활을 하고 싶었다.

부모님의 성화가 심했다. 빨리 결혼하라고 하셨다. 30살이 넘어서니 재촉이 더 심해졌다. 잔소리처럼 들렸다. 부모님 곁을 떠나고 싶었다.

2009년 생각지도 않은 일이 생겼다. 언니 친구가 남자를 만나 보라 했다. 한국 사람이라고 했다. 별 생각 없이 만났다. 지금의 남편 정봉훈(55) 씨였다. 정 씨는 친구들과 여행을 왔다. 2주간 머물렀다.

첫인상이 좋았다. 정장을 입은 모습이 멋있었다. 과묵한 모습에 믿음이 갔다. 귀가 커서 더 호감이 갔다. 마치 부처님 귀 같았다. 중국에는 속설이 있다. 귀가 크면 복이 많다고 믿는다. 남편이 중국말도 조금 했다. 인사정도는 할 수 있었다. 마음이 끌렸다. 연락처를 교환했다. 다시 만날 것을 약속했다. 2번 째 만났을 때 부모님께 인사를 시켰다.

남편이 한국으로 돌아갔다. 보고 싶어졌다. 국제통화가 이어졌다. 그리움이 사랑으로 변했다. 골드미스로 살고 싶은 마음이 사라졌다. 결혼하기로 마음먹었다. 부모님의 반대가 심했다. 멀리 떨어져 살면 안 된다고 했다. 혼자 외로울 거라고 말렸다. 중국에서 같이 살자고 했다. 부모님 말씀이 귀에 안 들어왔다.

이미 사랑에 눈멀고 귀가 먼 상태였다. 또 다른 이유도 있었다. 부모님과 떨어져 살고 싶었다.

2010년 무작정 한국으로 왔다. 결혼식을 올렸다. 32살 늦은 나이였다. 중국에서도 식을 올렸다. 가족들과 식사하는 작은 결혼식이었다.

한국에서의 생활은 쉽지 않았다. 문화적 차이가 컸다. 중국에서는 남자가 살림을 한다. 한국은 정반대 문화다. 남자는 가정 일에 손을 안 댄다. 이해할 수가 없었다. 명절에는 화가 날 정도였다. 여자들만 종종걸음을 하며 일했다. 남자들은 TV만 보고 있었다. 고향생각이 절로 났다. 설움이 복받쳐 눈물이 쏟아졌다.

화만 내고 있을 수 없었다. 한국사회 적응을 위해 노력했다. 다문화지원센터에 등록했다. 한국어 교육을 받았다. 중급 정도의 한국어 실력이 됐다. 여러 프로그램 수업도 신청했다. 파워포인트, 요리, 바리스타 교육 등 다양했다. 자격증도 따냈다. 여러 나라 친구들도 만났다. 외로움을 떨쳐 버렸다. 생활이 즐거웠다.

바삐 사는 중 첫딸 정지은(12)이 탄생했다. 친정 부모님이 오셨다. 산후조리를 돕기 위해서다. 1년간 도와주셨다. 

▲ 무융흉 씨는 남편이 한 달에 이틀만 쉬어 가족이 함께 하는 시간이 없다며 아쉬워 한다.<사진=무융흉 제공>

 

몸을 회복한 후 생활전선에 뛰어 들었다. 여러 직장을 다녔다. 아르바이트 형태였다. 어린이집 요리사로 한 달간 근무했다. 어린이 중국어 회화를 가르쳤다. 가방공장에도 나갔다. 사장이 성실성을 인정했다. 

 

정직원으로 근무하라 했다. 취업 요청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딸의 비염이 심했다. 일주일에 하루는 병원을 가야 했다. 육아가 걱정이 됐다. 아쉽지만 포기했다. 지금도 아쉬움이 남는다.


무융흉 씨는 이제 한국생활에 적응했다. 경력단절 여성에서 벗어나려고 한다. 둘째 아들 정지호(7)가 입학하면 일을 하려 한다. 미용사를 하고 싶은데 포기했다. 자격증 시험에 자신이 없어서다. 한국어 실력이 딸려 속상했다. 그래도 희망의 끈을 놓지 않는다. 다른 일을 찾을 거라고 한다. 돈도 벌고 사람도 사귈 거라며 웃는다.

무융흉 씨는 아직 귀화를 안 했다. 중국 국적을 갖고 있다. 중국에 갈 때 비자가 필요 없어서다. 중국비자를 받으려면 시간과 돈이 든다. 이유는 단 한 가지. 부모님을 쉽게 뵙기 위해서다. 한국생활 편의를 위해 영주권만 취득했다.

무융흉 씨는 부모님 얘기에 울음을 그치지 않았다. 어머니 얘기를 할 땐 감정이 북받쳐 큰소리로 울었다. 주위 사람들의 관심도 아랑곳 하지 않았다. 끝내는 잠시 인터뷰가 중단됐다.

“제가 한국 와서 가장 후회하는 게 있어요. 엄마와 떨어져 있는 겁니다. 처녀 때 엄마한테 못한 게 계속 후회돼요. 그때는 몰랐는데. 부모님은 아직도 중국에 제 보험료를 내주고 계세요. 나이 먹어 힘들어 지면 중국으로 오래요. 제 앞으로 집도 준비해 놓으셨어요. 부모님의 깊은 사랑을 이제야 깨우친 제가 너무 미워요.” (무융흉)

무융흉 씨의 눈물은 모든 이주민의 공통된 심정이다. 부모님이 보고 싶어 몸부림친다. 형제가 그리워 눈물짓는다. 옛 추억의 향수에 빠져 든다. 고향에 가고 싶어 한다. 명절이 되면 더욱 그렇다.

한국사회는 이들을 감싸주어야 한다. 이주민들의 고통을 함께 나눠야 한다. 다문화가정은 이방인이 아니다. 우리의 이웃이다. 대한민국의 힘이다. 대한민국의 미래다.

 

토요경제 / 김병윤 대기자 bykim7161@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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