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좋은 기업은 불황 때 드러난다
상생은 미담이 아니라 기업의 체력
김승원
ksw9030@naver.com | 2026-06-15 10:16:18
좋은 기업은 호황 때보다 불황 때 더 분명하게 드러난다.
경기가 좋을 때는 누구나 상생을 말한다. 실적이 좋고 현금이 돌 때 협력사를 챙기는 일은 어렵지 않다. 문제는 경기가 꺾이고 비용이 오르고 소비가 위축될 때다. 그때 협력사를 비용으로 볼 것인지, 함께 버텨야 할 파트너로 볼 것인지가 기업의 진짜 얼굴을 가른다.
요즘 기업 환경은 만만치 않다. 반도체를 중심으로 회복 기대는 있지만, 현장에는 여전히 불확실성이 크다. 원가 부담, 환율 변동, 금리 비용, 내수 회복 지연이 겹쳐 있다. 대기업도 어렵지만 중소 협력사는 더 빠르게 흔들린다. 납품대금이 며칠만 늦어져도 임금 지급과 원자재 구매가 막힐 수 있다.
그래서 최근 일부 대기업의 납품대금 조기 지급은 단순한 명절 이벤트로만 볼 일이 아니다. 현대차그룹은 설 연휴 전 6000여 개 협력사에 납품대금 2조768억 원을 앞당겨 지급했다. 삼성도 12개 관계사가 참여해 협력사 물품대금 7300억 원을 조기 지급했다. LG 역시 8개 계열사가 협력사 납품대금 약 6000억 원을 최대 2주 앞당겨 지급했다. 숫자보다 중요한 것은 방향이다. 협력사의 현금흐름을 지켜주는 일이 곧 공급망을 지키는 일이라는 인식이다.
기업의 선견지명도 결국 여기서 나온다. 정주영 회장은 모두가 어렵다고 할 때 건설과 조선, 자동차에 도전했다. 이병철 회장은 산업의 미래를 보고 전자와 반도체에 승부를 걸었다. 구인회 회장은 고객에게 필요한 제품을 만들겠다는 생각으로 생활산업의 길을 열었다. 이들의 공통점은 당장의 계산만 보지 않았다는 점이다. 사람과 시장, 산업의 다음 단계를 봤다.
오늘의 상생도 마찬가지다. 상생은 착한 기업 이미지를 위한 장식이 아니다. 장기 경쟁력을 위한 투자다. 협력사가 무너지면 품질이 흔들린다. 품질이 흔들리면 소비자가 떠난다. 소비자가 떠나면 브랜드도 무너진다. 기업 혼자 오래갈 수 없는 이유다.
물론 상생이라는 말이 남발돼서는 안 된다. 납품단가를 누르고, 광고비와 판촉비를 떠넘기면서 행사 때만 상생을 말하면 소비자는 금방 안다. 협력사도 안다. 시장도 안다. 진짜 상생은 사진 한 장보다 결제조건, 계약 관행, 기술 보호, 인력 양성에서 드러난다.
불황은 기업을 시험한다. 비용을 줄이는 기업은 많다. 그러나 신뢰를 지키는 기업은 많지 않다. 어려울 때 협력사를 붙잡고, 소비자 약속을 지키고, 지역사회와 함께 버티는 기업이 결국 다음 호황의 주인이 된다. 좋은 기업은 위기 때 드러난다. 오래가는 기업은 그 위기를 함께 넘긴 사람들을 잊지 않는다.
토요경제 / 김승원 ksw9030@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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