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문화가 미래다] 한국생활이 힘든 홍춘걸·최연미 부부, 한국에 온 걸 후회합니다.
한국과 중국 모두에게서 차별받을 때는 눈물이 납니다.
자녀들을 위해 국적을 바꿀까 생각하고 있습니다.
김병윤 기자
bykim7161@hanmail.net | 2022-08-18 09:38:44
▲ 홍춘걸. 최연미 부부는 자녀들이 한국생활을 좋아해 중국으로 돌아기기도 힘든 상황이라고 밝힌다. <사진=최현미씨 제공>
“한국에 온 걸 후회합니다. 지금도 후회하고 있습니다. 이제는 중국으로 돌아갈 수도 없는 형편이에요. 아이들이 중국에는 안 간대요. 어쩌겠어요. 일단 한국에서 열심히 살아 봐야죠.”
홍춘걸(39) 최연미(37) 부부의 심정이다. 조선족이다. 국적은 중국이다. 한국생활 만 3년 2개월이 된다. 광저우에서 왔다. 무역회사를 운영했다. 부부가 같이 근무했다. 브라질로 옷 부자재를 수출했다. 단추 등 여러 가지였다.
중국생활은 편안했다. 한국의 37평 규모 아파트에서 살았다. 수입도 괜찮았다. 중상위 생활을 했다. 경기불황에 사업을 접었다. 때마침 한국에 먼저 와있던 최 씨의 어머니가 들어오라 했다. 부부는 한국행을 결정했다. 부인 최 씨가 2019년 7월에 먼저 한국에 왔다. 남편 홍 씨는 2018년 들어왔다. 홍 씨의 부모님도 오래전 한국에 정착했다.
부부의 한국행이 사업부진 만은 아니었다. 중국에서의 차별도 원인이었다. 광저우에서는 부부가 헤이룽장성 출신이라고 차별했다. 타지역 출신 자녀는 공립학교 입학이 어려웠다. 사립학교에 입학을 했다. 교육비도 많이 들었다.
부부의 한국생활은 고통의 연속이었다. 우선 집장만이 힘들었다. 반지하방을 보러 다녔다. 도무지 살 수 없어 포기했다. 어렵사리 방을 구했다. 옥탑 방이었다. 보증금 3백만 원. 월세 50만 원 사글세였다. 이런 집도 있구나 하며 울기도 했다. 광저우의 아파트가 생각났다.
한국의 높은 물가에도 놀랐다. 처음에는 빵도 못 사먹었다. 대림시장에서 중국 빵 한 개에 천원이었다. 빵을 사려다 발길을 돌렸다. 중국에서는 상상도 못한 가격이었다. 한국에 올 때 2천만 원을 갖고 왔다. 중국에서는 큰돈이었다. 6개월 만에 모두 썼다. 어쩔 수 없이 어머니와 시부모 도움으로 살았다.
▲ 최현미 씨와 큰아들 <사진=최연미씨 제공>
자녀들의 교육도 문제였다. 두 아들이 한국말을 못했다. 한국에 올 때 9살, 6살이었다. 큰아들이 학교에 갈 수 없었다. 한국어를 몰라서였다. 한국어를 가르쳤다. 6개 월 정도 있으니 말문이 트였다. 아이들이 빨리 적응했다. 자녀들 입학도 쉽지 않았다. 입학서류 제출이 복잡했다. 학교와 교육청이 서로 다른 서류를 요청했다. 부리나케 발품을 팔았다. 최 씨는 2년 동안 아이들 뒷바라지에 일을 할 수 없었다. 자녀들이 학교에 간 뒤 시간적 여유가 생겼다.
2021년 최 씨가 생활전선에 뛰어 들었다. 남편은 공사현장에서. 부인은 마트에서 일을 했다. 최 씨는 3개월 근무 후 다른 곳으로 옮겼다. 대우도 좋아졌다. 경제적 어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기쁨도 잠시였다. 최 씨에게 근무 1주일 만에 고난이 닥쳤다. 2021년 11월이었다. 큰아들이 코로나에 걸렸다. 최 씨가 감염됐다. 시설격리 10일 조치가 내려졌다. 작은아들도 접촉자로 격리됐다. 남편도 감염됐다. 격리조치에 일손을 놓았다. 가족의 감염이 이어졌다. 마트에서 권고사직을 시켰다. 수입이 끊겼다. 남편은 2022년 2월까지 일을 할 수 없었다.
부부는 2022년 3월부터 재기에 나섰다. 남편은 공사장에 나갔다. 부인은 마트에 다시 취직했다. 봄볕이 따스하게 느껴졌다. 자녀들도 웃음을 되찾았다. 한국생활에 만족해하고 있다. 그래도 부부는 마음을 잡지 못하고 있다. 지금도 고민의 날을 보내고 있다.
“솔직히 지금이라도 광저우로 돌아가고 싶어요. 우리 소유의 넓은 아파트가 있잖아요. 언니도 들어오라고 합니다. 언니가 잘 살아요. 힘들면 도와주겠다고 합니다. 중국에 가면 한국보다 편히 살 수 있습니다. 문제는 아이들이에요. 아이들은 한국이 좋대요. 아이들을 위해서는 한국에서 살아야 하고요. 고민입니다.” (최연미)
“저도 고민을 많이 합니다. 아내와는 생각이 좀 달라요. 제가 중국에 간다한들 지금 무슨 일을 하겠어요. 무역업도 이미 손을 놨고요. 할 수 없이 공사장에서 일을해 야 합니다. 그럴 거라면 한국에서 해야죠. 한국은 임금도 높고 작업환경도 좋습니다. 그리고 사회생활 수준이 높지 않습니까. 가장 중요한 의료수준과 교육수준이 최고 아닙니까. 저는 한국에서 노력해 아이들을 훌륭하게 키우고 싶습니다.” (홍춘걸)
부부는 의논 끝에 결론을 내렸다. 일단은 한국에서 열심히 살자고. 아이들을 위해 희생하자고. 자녀들의 울타리가 돼 주자고.
부부는 자녀들이 한국인으로 살기 원한다. 자녀들은 이미 자신을 한국인이라 생각하고 있다. 중국에 대한 추억을 오래 전에 잊어 버렸다. 그래서 부부는 목표를 정했다. 2023년에는 양꼬치 가게를 내기로. 광저우에서 운영했던 양꼬치 가게의 경험을 살리기로 했다. 창업 자본은 광저우의 아파트를 팔아서 만들 생각이다. 그 후에 영주권을 신청할 계획이다. 한국국적 취득과정을 밟기 위해서다.
부부는 자녀에게 미안한 마음을 갖고 있다. 부인 최 씨는 친구들을 집에 못 오게 한다. 친구들이 놀러와 비교할까 두려워서다. 남편 홍 씨는 아이들에게 드라이브를 시켜주고 싶어 한다. 아직 차가 없어 동심의 나래를 펴주지 못해 안타깝다고 말한다.
자녀 걱정으로 말을 잇던 부부의 마지막 대화가 귓가를 때린다.
“남편이 열사병에 쓰러질까 봐 걱정이에요.”(최연미)
토요경제 / 김병윤 대기자 bykim7161@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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