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경제 17주년 특별기획] 서울 토박이가 말하는 진짜 '서울 이야기'(34)

사연도 많았던 ‘명동의 풍속도’, 앙드레 김이 수련했던 ‘명동의 의상’, 자부심이 있었던 ‘명동의 걸인’, 쇼핑문화의 변혁을 주도한 ‘백화점’

김병윤 기자

bykim7161@hanmail.net | 2022-04-29 00:00:01

서울은 1392년 조선이 건국된 이래 600년 넘게 수도의 자리를 지키고 있다. 서울은 그렇게 우리나라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중심지였다. 서울을 이해한다는 건 결국 우리의 과거, 현재, 미래에 다가선다는 뜻일 게다. 이 연재는 '찐 서울 토박이'자 '대한민국 연예1호' 기자로 불리는 정홍택 선배의 구술을 기초 삼아 김병윤 대기자가 꼼꼼히 현장을 누비며 쓴 글이다. 김 병윤 대기자가 전하는 생동감 넘치는 서울 이야기를 '토요경제 17주년 특별기획'으로 본지에서 매주 2회 독자에게 전하려 한다. [편집자 주]

 

사연도 많았던 '명동 풍속도' 

명동은 젊음의 거리다. 예전에도 그랬다. 과거에는 통제가 심했다. 통행금지도 있었다. 자정 이후에는 다니지를 못했다. 일 년에 딱 이틀만 통행금지가 풀렸다. 12월24일과 31일 뿐이었다. 서울시민들이 명동으로 모였다. 명동성당을 거쳐 갔다. 종교에 상관이 없었다. 성당의 종소리를 들으며 한 해를 마무리 했다. 사건 사고도 많았다. 소매치기들이 들끓었다. 피해가 심했다. 젊은이들의 로맨스도 꽃 피었다. 24일과 31일은 사랑이 싹트는 시간이었다. 크리스마스 연말 베이비라는 말이 유행했다. 여관이 대목을 만났다. 방이 모자라 바가지요금도 심했다.명동은 유행을 창조했다. 헤어스타일을 바꿔 놨다. 오드리 헵번 헤어스타일이 유행했다. 로마의 휴일 여주인공 머리모양이다. 꽁지 빠진 할미새라 불렀다. 여기저기 눈에 띄었다. 헵번이라는 가게가 우후죽순처럼 늘어났다. 다방 옷가게가 많았다.

거리에는 노래가 흘러 나왔다. 1960년대 초중반 이다. ‘노란 샤쓰 사나이’, ‘우리 애인 올드미스’, ‘이별의 부산정거장’ 등이었다. 노상방가를 했다. 어깨동무를 하고 불렀다. 트위스트춤이 유행했다. 명동이 트위스트 춤의 산실이다. 길에서도 추었다.

장발과 미니스커트 단속이 심했다. 1966년 윤복희가 귀국하면서 미니스커트 열풍이 몰아쳤다. 기성세대는 아연실색했다. 정부는 대대적 단속에 들어갔다. 명동에서 젊은 남녀가 많이 잡혔다. 경찰은 총 대신 가위와 대나무자를 갖고 다녔다. 치마가 무릎에서 10Cm 위로 올라가면 단속대상이었다. 벌금을 매겼다. 단속 장면이 TV로 방영됐다. 머리가 길면 가위로 잘라냈다. 대중문화 예술인이 많이 잡혔다. 가수 중에는 송창식이 많이 걸렸다. 하루에 몇 번 씩 잡힌 적도 있다. 단속된 사람을 찍어 전시하기도 했다. 초상권 침해였다. 지금은 상상이 안 된다. 명동의 파출소는 쉴 틈이 없었다. 잡혀온 젊은이로가득 찼다. 전국에서 가장 바쁜 파출소가 있었다. 명동파출소였다.

앙드레 김이 수련했던 ‘명동의 의상’
명동은 패션의 산실이다. 의상의 유행을 창조했다. 의상업계에 양대 산맥이 있었다. 최경자 국제복장학원과 노라노 복장학원이었다. 최경자는 한국 패션의 개척자다. 인품이 훌륭했다. 아랫사람에게 언제나 존댓말을 썼다. 상업적으로 장사를 안 했다. 최경자 싸롱을 운영했다. 지금의 살롱과 뜻이 다르다. 술을 파는 곳이 아니다. 미용실도 싸롱이라 부르던 시절이다. 충무로와 명동 사이에 있었다.

앙드레 김을 직원으로 채용했다. 최경자 국제복장학원의 1기생이다. 앙드레 김의 공로는 인정받아야 한다. 한국패션을 세계 수준으로 올려놨다. 한국 의상 1호 수출기록을 갖고 있다. 1960년 대였다. 한국이 가난에 찌들던 시절이었다. 미국에서 옷을 주문받았다. 100벌을 생산했다. 주문자가 깜짝 놀랐다. 예상 밖의 수준이었다. 코리아에 이런 사람이 있냐고 감탄했다.

앙드레 김의 명성이 알려지기 시작했다. 앙드레 김은 한국 외교력 강화에도 공헌했다. 주한 대사 부인들에게 옷을 무료로 제공했다. 대사 부인들이 파티에 꼭 그 옷을 입고 나갔다. 한국을 떠난 뒤에도 입고 다녔다. 다음 근무지에서도 앙드레 김의 옷을자랑했다. 한국을 널리 알렸다. 최경자 사단의 공로다. 앙드레 김은 떠났다. 떠난 자리가 크다. 패션계의 큰 별을 잃었다. 외교적 손실도 크다. 민간외교의 큰 몫을 하고 영면했다.

노라노 복장학원도 큰일을 했다. 자신만의 길을 개척했다. 최경자는 주문생산을 했다. 노라노는 기성복을 만들었다. 편한 복장으로 삶을 편하게 했다. 대중성이 있었고 가격도 저렴했다. 찾는 사람이 많았다. 전국 의류 소매상이 명동에 모였다. 지금의 동대문과 비슷했다. 학원생의 취업에도 도움을 줬다. 돈도 많이 벌었다. 수익성이 좋았다. 최경자에 비해서.

자부심이 있었던 ‘명동의 걸인’ ▲ MBC 드라마 '왕초' 화면캡쳐

 

6.25 전쟁 후 전국에 걸인이 많았다. 거지라고 했다. 명동도 예외는 아니었다. 다방마다 걸인
이 나타났다. 다방 하나에 100여 명의 걸인이 들락거렸다. 주인의 골칫거리였다. 주인이 돈을 많이 착취당했다. 주인들이 나중에 돈을 안 줬다. 걸인은 손님에게 구걸을 했다. 영업에 방해를 했다. 손님이 끊어질 지경이었다. 주인들이 묘책을 내놨다. 걸인의 왕초를 불렀다. 타협을 했다. 일정금액을 주고 출입을 금지시켰다. 걸인의 조직은 힘이 대단했다. 잘 못 건드리면 장사를 접어야 했다. 걸인의 지역싸움도 치열했다. 다른 지역 걸인은 명동에 못 들어왔다. 명동의 걸인은자부심이 대단했다.

쇼핑문화의 변혁을 주도한 ‘백화점’

▲ 1930년대 화신백화점  <사진=한국학중앙연구원 제공>

 

일제 강점기에 도입됐다. 미스코시 백화점이 문을 열었다. 현재의 신세계백화점 자리다. 신세계백화점 본관 건물은 문화재다. 근대문화재 건물로 보존되고 있다. 건물의 가치가 높다. 건물 밖은 손을 못 댄다. 내부만 수리해서 사용한다. 한국 최초로 엘리베이터를 운행했다. 신선한 충격이었다.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발 디딜 틈이 없었다. 헤아릴 수가 없었다. 물건 구입은 뒷전이었다. 진열된 물건을 구경하려 했다. 엘리베이터를 타기 위해 왔다. 수동식 회전문도 있었다. 신기했다. 서로 들어가려 했다. 안전사고도 많았다. 안전요원을 별도로 배치했다. 백화점은 고민에 빠졌다. 매출이 안올랐다. 해결책을 찾았다. 식당을 개업했다. 고육지책이었다. 큰 효과는 없었다. 쇼핑의 시초라 할 수 있다.미스코시백화점은 해방 후 주인이 바뀌었다. 동화백화점으로 개명했다. 동화백화점에 최초의 민영방송국이 들어섰다. 5층에 소규모 공연장이 있었다. 그 자리에서 동양방송이 개국했다. 한국 경제가 발전하던 시기였다. 동화백화점이 경영부실을 겪었다. 삼성그룹이 인수했다. 오늘의 신세계 백화점이다.


조지아백화점도 있었다. 일제강점기에 들어왔다. 해방 후 미도파백화점으로 변경했다. 대농그룹의 박용학 씨가 인수했다. 명동입구에 자리 잡았다. 고객이 많았다. 시민의 사랑을 많이 받았다. IMF 파도를 넘지 못하고 문을 닫았다. 대농그룹도 해체됐다.

화신백화점도 추억의 장소다. 순수 한국자본이었다. 미스코시 백화점의 단점을 보완했다. 엘리베이터를 증설했다. 유명세를 탔다. 종로의 명소였다. 만남의 장소였다. 젊은이들이 모였다. 부근에 술집이 늘어났다. 음식점도 많이 생겼다. 1970년대 까지 성행했다. 화신백화점 때문에 유명해진 식당이 있다. 이문설렁탕이다. 화신백화점 뒤에있었다.

화신백화점은 시골사람들의 관광코스였다. 시골사람들은 계를 들었다, 서울구경을 하기 위해. 코스가 있었다. 최우선이 숭례문이었다. 경복궁이 뒤를 이었다. 다음이 화신백화점이었다. 신신백화점도 있었다. 화신백화점 건너편이었다. 지금의 스탠다드차타드은행 본점 자리다. 화신백화점과 함께 사라졌다.

 

토요경제 / 김병윤 대기자 bykim7161@hanmail.net 

[ⓒ 토요경제. 무단전재-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