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경제 17주년 특별기획] 서울 토박이가 말하는 진짜 '서울 이야기'(33)
대중음악인들의 휴식처 ‘송도’, 명동의 대중식당, 세계적인 음악가 정트리오를 키워낸 ‘고려정’, 문화인들에게 공짜로 식사도 제공했던 ‘미성옥’, 생새우 요리를 처음 선보인 ‘동락일식집’, 대중문화의 전당 ‘시공관(명동예술극장)’,KPK악단, 아이디어가 돋보였던 ‘부기우기 쇼’, 미모의 여장부가 이끌었던 ‘박단마쇼’
김병윤 기자
bykim7161@hanmail.net | 2022-04-26 23:56:31
서울은 1392년 조선이 건국된 이래 600년 넘게 수도의 자리를 지키고 있다. 서울은 그렇게 우리나라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중심지였다. 서울을 이해한다는 건 결국 우리의 과거, 현재, 미래에 다가선다는 뜻일 게다. 이 연재는 '찐 서울 토박이'자 '대한민국 연예1호' 기자로 불리는 정홍택 선배의 구술을 기초 삼아 김병윤 대기자가 꼼꼼히 현장을 누비며 쓴 글이다. 김 병윤 대기자가 전하는 생동감 넘치는 서울 이야기를 '토요경제 17주년 특별기획'으로 본지에서 매주 2회 독자에게 전하려 한다. [편집자 주]
대중음악인들의 휴식처 ‘송도’
대포집이다. 음악인이 모였다. 대중음악인이다. 길옥윤, 이봉조가 단골이었다. 뛰어난 작곡가들이다. 가수도 발길이 잦았다. 자연스런 현상이었다. 곡을 받기 위해서다. 악단장도 찾았다. 정보가 많았다. 신인가수도 발탁했고 만나는 재미가 있었다. 지나간 추억을 회상했다. 현실의 어려움을 의논했다. 미래의 꿈을 설계했다. 송도에는 가요계의 애환이 간직됐다.
송도는 안주도 다양했다. 동그랑땡, 꼬막, 피조개, 부침개 등이었다. 안주도 서민적이었다. 손님의 사랑을 받은 것이 있다. 된장시래기국이었다. 공짜로 줬다. 정말 맛있었다. 구수했다. 해장에 최고였다. 본안주보다 더 인기가 좋았다. 안주 하나에 된장국만 시키기도했다. 주인은 싱긋 웃었다. 걱정 말고 계속 시키라고. 정이 있던 시대였다.
은하수라는 술집이 있었다. 막걸리를 팔았다. 송도와 다른 분위기였다. 젊은 음악인이 진을 쳤다. 자유스러운 분위기였다. 선배 눈치를 보지 않고 떠들었다. 자신들만의 세계를 즐겼다.
명동의 대중식당, 세계적인 음악가 정트리오를 키워낸 ‘고려정’
음식점을 경영했다. 고려정이다. 한식당이었다. 냉면으로 유명했다. 사람들이 줄을 섰다. 문전성시였다. 손님의 계층도 다양했다. 정치, 문화, 예술계 인사도 많이 왔다.
호사다마랄까. 잘 나가던 고려정에 액운이 닥쳤다. 못된 고객의 모함이었다. 악질 고객에게 당했다. 어느 날 신문에 고려정 기사가 크게 났다. 냉면에서 지렁이가 나왔다고. 제보한 고객의 자작극이었다. 냉면에 일부러 지렁이를 넣었다. 고객의 발걸음이 뚝 끊겼다. 나중에 진실이 밝혀졌다. 거짓으로 판명됐다. 누명은 벗었지만 방법이 없었다. 한 번 떠난 손님은 돌아오지 않았다. 음식업의 특성이다. 문을 닫았다. 자녀를 위해 시작한 장사인데. 유학비를 벌려고 했는데. 가슴이 미어지는 아픔이었다.
고려정자리에 백화점을 세웠다. 고려백화점이었다. 백화점 사업은 지지부진 했다. 폐업을 했다. 더 큰 결정을 했다. 미국으로 이민을 가기로 했다. 정 씨 3남매는 큰 인물이 됐다. 어머니의 헌신적 사랑 덕에. 고려정은 사라졌다. 어머니의 무한한 사랑을 간직한 채.
문화인들에게 공짜로 식사도 제공했던 ‘미성옥’
설렁탕 식당이다. 지금도 영업을 한다. 오래된 집이다. 문화인이 많이 모였다. 문화인들이 모이는 이유가 있었다. 주인의 인심이 좋았다. 문화인을 특별대우 했다. 식사 값을 절반만 받았다. 그마저도 어려운 경우가 있었다. 돈 있는 만큼만 받았다. 어떨 때는 공짜로 줬다. 낭만이 있고 정이 흘러 넘쳤다. 주인이 문화 예술을 사랑했다. 화가도 많이 왔다. 김환기, 이중섭, 천경자 등이 술잔을 기울였다. 이중섭이 특이했다. 술을 마시고 싶을 때 했던 행동이다. 담배 갑에 그림을 그려줬다. 술 한 잔과 그림을 바꿨다. 다정다감했던 시절이었다.
생새우 요리를 처음 선보인 ‘동락일식집’
희귀한 일식집이었다. 한국에 최초의 요리를 선보였다. 생새우 요리다. 오도리라 많이 부른다. 지금은 흔한 요리다. 1960년대에는 생소했다. 동락일식집이 유일했다. 새우를 날로 먹다니. 사람들이 의아해 했다. 먹어보니 꿀맛이었다. 입에서 신선함이 느껴졌다. 입소문을 타고 퍼져나갔다. 생새우를 맛보기 위해 줄을 섰다. 문제가 생겼다. 생새우 구하기가 어려웠다. 수요를 맞추기 힘들었다. 값이 엄청 비쌌다. 가격은 문제가 안 됐다. 먹게만 해달라고 했다. 예약이 필수였다.
명동에는 통닭구이로 유명했던 곳이 있다. 영양센터와 자양센터다. 통닭구이의 라이벌이었다. 전기통닭구이였다. 지금은 보기 힘들다. 70년대에는 인기를 끌었다. 서민들의 보양식이었다. 통닭의 인기는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
대중문화의 전당 ‘시공관(명동예술극장)’
원명은 시공관으로 출발했다. 국립극장으로 바뀌었다. 다시 시공관으로 원명을 되찾았다. 지금은 명동예술극장이다. 연극의 본산이다. 대중예술 발전의 본거지다. 수많은 공연이 시공관에서 이뤄졌다. 1960~70년대에는 악단 위주의 공연이었다. 유명했던 악단들이 있었다. 기발한 아이디어로 공연했다. 당시로서는 파격적이었다.
KPK악단
김해송이 단장이었다. 가수 이난영의 남편이다. 작곡가 겸 가수였다. 매니저 역할도 했다. 이난영의 성공을 뒷바라지 했다. 김 시스터즈, 김 브라더스의 아버지다. 가족 전체가 음악인이다. 자녀에 대한 사랑이 지극했다. 쇼에 대한 감각이 뛰어났다. 버라이어티 쇼를 도입했다. 음악만 한 것이 아니었다. 쇼, 코미디를 함께 공연했다.
아이디어가 돋보였던 ‘부기우기 쇼’
윤부길 송달협 콤비가 제작했다. 10여명으로 악단을 구성했다. 윤부길은 쇼 흥행의 달인이었다. 가수 윤항기 윤복희의 아버지다. 새로운 것을 많이 시도했다. 가수를 등장시킬 때 상상을 초월했다. 2층에서 노래를 부르며 내려왔다. 2층 객석에서 도르래를 잡아당겼다. 가수는 도르래 줄에 의지하고 내려왔다. 당시로서는 상상이 안 되는 생각이었다. 번뜩이는 아이디어였다. 관객은 환호했다.
윤부길은 윤복희의 재능을 일찍 알아챘다. 5살 때부터 노래를 시켰다. 윤복희는 미군부대에서 먼저 노래했다. 송영란과 함께 듀엣으로. 송영란은 송달협의 딸이다. 2대에 걸쳐 부녀지간의 인연을 이어갔다. 윤복희는 노래를 잘했다. 춤도 잘 췄다. 미군은 열광했다. 아버지의 유전자를 그대로 물려받았다.
윤복희에게는 3가지 기록이 있다. 미니스커트 최초. 외국곡으로 데뷔도 처음이다. 처음으로 춤추며 노래를 했다. 윤부길은 윤항기의 연예계 진출을 말렸다. 아들은 절대 안 된다는 생각이었다. 윤항기에게 매도 많이 들었다. 윤항기도 많이 맞았다고 실토했다. 아무리 말려도 안 됐다.아버지에게 받은 끼를 버릴 수 없었다.
미모의 여장부가 이끌었던 ‘박단마쇼’
여자다. 가수 겸 쇼 단장이었다. 여자가 무시당하던 시절에 능력을 발휘했다. 예쁜 얼굴의 소유자다. 미모가 뛰어났고 성격도 활달했다. 다재다능했다. 완전 미국 스타일이었다. 노래와 춤을 겸비했다. 미8군 오디션에서 항상 A를 받았다. 시공관에서 데뷔무대를 가졌다. 인기몰이를 한동안 했다. 꿈을 키워 미국으로 진출했다. 샌프란시코에서 활동했다. 박단마는 미국에 안주헤 평범한 삶을 살고 있다. 시공관에서는 가수도 자주 공연했다. 고운봉 현인 김정구 등이 무대에 올랐다.
이수일과 심순애도 자주 공연됐다. 시공관은 서울시민에게 많은 위안을 줬다. 시민만이 아니다. 대중문화 종사자들에게 삶의 터전을 제공했다. 명동이라는 명칭에 걸맞게 밝음을 선사했다.
토요경제 / 김병윤 대기자 bykim7161@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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