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경제 17주년 특별기획] 서울 토박이가 말하는 진짜 '서울 이야기'(32)
문화가 정치보다 앞서가던 곳 '명동', 가왕을 탄생시킨 '명동과 조용필' 명동의 술집 '은성', 밴드 문화의 출발점 '은성회관'
김병윤 기자
bykim7161@hanmail.net | 2022-04-21 23:55:28
서울은 1392년 조선이 건국된 이래 600년 넘게 수도의 자리를 지키고 있다. 서울은 그렇게 우리나라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중심지였다. 서울을 이해한다는 건 결국 우리의 과거, 현재, 미래에 다가선다는 뜻일 게다. 이 연재는 '찐 서울 토박이'자 '대한민국 연예1호' 기자로 불리는 정홍택 선배의 구술을 기초 삼아 김병윤 대기자가 꼼꼼히 현장을 누비며 쓴 글이다. 김 병윤 대기자가 전하는 생동감 넘치는 서울 이야기를 '토요경제 17주년 특별기획'으로 본지에서 매주 2회 독자에게 전하려 한다. [편집자 주]
문화가 정치보다 앞서가던 곳 ‘명동’
명동은 서울의 축소판이다. 아니다. 서울이 명동의 확대판이다. 넓게 보면 얘기가 달라진다. 전국이 명동의 확대판이다. 명동에 있던 것이 서울에 있다. 전국에 퍼져있다. 명동은 한국의 중심이다. 한국현대사의 발자취다. 정치, 경제, 문화, 종교, 체육 모든 분야가 연관돼 있다. 인간사에 필요한 모든 것이 명동에 있었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강남이 없던 시절이 있었다. 강북만 존재했다.
지금의 강남은 버려진 땅이었다. 서울인구가 삼백만이 안 되던 시절이었다. 모든 생활의 중심이 명동이었다. 명동에서 모든 것이 이뤄졌다. 명동은 서울시민에게 어떤 곳일까. 마음의 고향이다. 서울 수복 후 명동은 폐허가 됐다. 돌아온 피난민은 할 말을 잃었다. 정신이 혼미해졌다. 허전함을 달랠 수 없었다. 땅바닥에 주저앉아 통곡했다. 소주에 안타까움을 타서 마셨다. 오징어를 씹으며 울분을 삼켰다. 명동은 그런 곳이다. 서울시민의 정신적 보고다. 마음의 안식처다. 삶의 터전이다.
명동은 명예방(明禮坊)으로 불리었다. 1800년대 조선조 후기였다. 고종 때 방으로 나눴다. 지금의 동(洞)이다. 명동은 한 때 청나라 군이 득세했다. 임오군란 때 청나라에 파병을 요청해서다. 당시의 명동은 외세의 각축장이었다. 프랑스, 중국, 일본이 쟁탈전을 벌였다. 문화적 영향도 컸다. 대표적인 것이 명동성당이다. 프랑스가 카톨릭을 전파했다. 명동은 정치와 경제의 일번지였다. 예술의 산실이었다. 대중예술인의 창작 공간이었다. 조용필도 명동에서 실력을 쌓았다. 명동에서 오늘의 한류가 싹텄다. 명동은 아직도 예전의 멋과 맛을 느낄 수 있다. 흘러간 추억을 되살려 준다.
가왕을 탄생시킨 ‘명동과 조용필’
조용필은 가왕(歌王)이다. 어떻게 가왕이 됐을까. 피나는 노력의 대가다. 혹한 속에 피어난 꽃이다. 조용필은 질곡의 세월을 보냈다. 1970년대 초였다. 대마초 사건에 연루돼 음악 활동을 접었다. 갈 곳이 없었다. 명동에 둥지를 틀었다. 명동 뒷골목의 작은 바였다.
절치부심하며 밤낮없이 기타 줄을 튕겼다. 다른 악기도 연주했다. 쉼 없이 노래를 불러 피를 토하기도 했다. 목청이 터졌다. 가수의 맛과 멋을 익혔다. 때를 기다리며 부산으로 내려갔다. 곡을 만들었다. ‘돌아와요 부산항에’였다. 혼신을 다해 불렀다. 모든 열정을 쏟아 부었다. 대성공이었다. 여기저기서 불러댔다. 전국에 광풍이 몰아쳤다. 부산 앞바다의 파도도 잠재웠다. 가왕이 탄생했다. 조용필과 위대한 탄생.
조용필의 성공에 숨은 일화가 있다. 누나와 매형이 미국에 살았다. 식당을 했다. 선지해장국 식당이었다. 미국에서는 소피를 공짜로 줬다.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았다. 매형이 한국에 와서 선지 굳히는 방법을 배워서 갔다. 뉴욕에서 문을 열었다. 미국의 유일한 선지식당이었다. 대박이 났다. 돈을 많이 벌었다.
조용필이 누나에게 부탁했다. 전자오르간을 사달라고. 오르간을 사 달라는데 어쩌면 좋겠냐고 매형에게 물었다. 매형은 사주라고 했다. 그 오르간이 조용필의 운명을 바꿨다. 조용필은 오르간을 두드렸다. 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자신과 한 몸이 됐다. 오르간을 싸들고 부산으로 내려갔다. 위대한 탄생이 시작됐다.
조용필은 끼가 있다. 대학가요제 심사위원을 맡았을 때다. 출연자가 노래를 아주 잘했다. 장원을 주려했다. 조용필이 반대했다. “가수는 노래를 잘해도 소용없다. 끼가 있어야 한다”고 했다. 심사위원들이 동의했다. 조용필의 음악성을 발견할 수 있었다. 조용필은 지금도 말한다. 명동이 제2의 고향이라고. 명동의 뒷골목이 나를 다시 태어나게 했다고.
명동의 술집, 최불암 어머니가 정을 베푼 ‘은성’
유명한 막걸리 집이었다. 탤런트 최불암의 어머니가 운영했다. 정이 흘러 넘쳤다. 믿음의 사회를 볼 수 있었다. 문학인과 연극인이 모였다. 가난한 사람들 모임이었다. 술값은 언제나 외상이었다. 주문하는 대로 주었다. 잔소리도 안 했고 얼굴 붉힘도 없었다.
주인이 세상을 떠났다. 사후에 외상장부가 나왔다. 100여개가 넘었다. 외상값은 허공으로 날아갔다. 외상장부 내용을 아는 사람이 있다. 최불암이다. 절대 공개를 안 한다. 어머니의 추억과 함께 묻고 있다.
은성은 벽에 낙서가 요란했다. 수준 높은 낙서였다. 벽이 곧 원고지였다. 한 잔 술에 시상이 떠올랐다. 잊혀질까 두려워 그대로 옮겨졌다. 빛바랜 벽 위에 흔적을 남겼다. 은성은 손님에게 특이한 대접을 했다. 자주 찾는 고객에겐 같은 자리를 제공했다. 손님의 취향을 알고 있었다. 빈센트 반 고호처럼 대접했다. 고호는 언제나 같은 자리를 원했었다.
최불암은 은성에서 연기자의 꿈을 키웠다. 중앙고 시절 연극을 시작했다. 은성에 자주 나갔다.연극계 선배들 시중을 들며 얼굴을 익히려 했다. 어머니가 야단을 쳤다. 교복이라도 벗고
오라고. 어머니의 자식사랑을 느끼게 했다.
밴드 문화의 출발점 ‘은성회관’
고급 술집이었다. 큰 식당이었다. 무대를 설치했고 맥주를 팔았다. 양주도 판매했다. 밴드가 나왔다. 박춘석, 노명석밴드가 무대에 섰다. 노래도 불렀다. 밴드문화의 출발점이었다. 박춘석은 유명 작곡가다. 수많은 히트곡을 만들었다. 피아노를 잘 쳤다. 피아노에 대한 애정이 대단했다. 무대에서도 피아노를 연주했다. 은성회관에 피아노가 없었다. 집에서 가져왔다. 화물차로 옮겼다. 다른 업소로 옮길때도 그랬다. 고생이 많았다. 피아노 옮기는데 돈이 많이 들어 운송비가 장난이 아니었다. 주변에서는 말렸다. 피아노 없이 하라고 했다. 고집을 꺾지 않았다. 주관이 확실했다. 장인 정신을 갖고 있었다. 박춘석의 무대는 빛이 났다. 분위기가 달랐다. 손님에게 인기를 끌었다. 많은 사랑을 받았다.
은성회관의 사회자가 독특했다. 사회자의 인기도 높았다. 훗날 코미디언으로 이름을 날렸다. 곽규석이다. 후라이보이로 알려져 있다. 코미디를 했다. 기존의 코미디와 달랐다. 몸을 움직이지 않고 서서 했다. 말로 웃겼다. 스탠딩코미디였다. 고급 코미디를 선보였다. 코미디의 새로운장르를 열었다. 곽규석의 신분이 특이했다. 현역 공군 중사였다. 잡음이 생겼다. 군인이 술집에서 사회를 본다고. 공군본부가 허락했다. 공군의 명예를 높인다고.
토요경제 / 김병윤 대기자 bykim7161@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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